그것은 단순한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주먹만한 크기의 하얀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고 잡고 하는 것이 게임의 전부다. 하지만, 하지만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본 사람들은 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울어대는 소쩍새처럼, 프로야구 개막만을 기다리며 스포츠기사를 검색하는 마음을. 봄은 그렇게 야구와 함께 시작되는 것임을.

WBC가 있었다? 시범경기가 있었다.

2009년의 야구는 이미 WBC에서 시작된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애국자일 수는 있지만 야구팬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선수들은 ‘야구’를 했다. 다만 미디어는 ‘대한민국’을 중계했을 뿐이다. 그곳엔 한국의 입장으로 보면 악당역을 자처한 일본의 ‘입치료’만 있었을 뿐,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안타에 빛나는 스즈키 이치로는 없었다. 온나라가 떠들썩하고 당최 야구장마저도 불도저로 밀어버릴 것 같은 대통령마저도 입만 열면 야구 이야기였지만, 나는 조용히 아무곳에서도 중계해주지 않는 시범경기 결과를 찾아볼 뿐이었다.

그러나 시범경기는 솔직히 재미없었다. 박지성, 박주영, 이영표, 설기현이 없는 국내프로축구리그가 재미없는 것처럼 WBC에 참가하는 각 팀의 주축 선수들이 없는 시범경기는 당최 횟집에서 회는 안나오고 스끼다시만 나온 느낌이다. 스타급 선수들이 빠져있으니 시범경기를 보고 올시즌 판도를 예상하기는 더욱 난망하고, WBC 때문에 페이스를 너무 빨리 올린 대표선수들이 과연 조화롭게 소속팀에 복귀할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그래서 사실 난 WBC가 국내리그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막도 하기 전에 팬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롯데의 돌풍이 만만치 않았다. 뭐 롯데야 ‘8888577’(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롯데 팀 성적)을 써내려 갈 때도 봄에는 항상 잘했다고 하지만, 에이스와 4번타자, 포수, 유격수 등 팀의 핵심이 빠진 상황에서 11승 1패의 성적을 거둬서 안그래도 흥분과다인 롯데 팬들에게 진정제가 아닌 각성제 주사를 놓은 격이 되었다. 시범경기에서 팀으로서는 롯데가 돌풍이었다면, 선수로서는 한화의 유격수 송광민이 눈에 띄었다. 일찍부터 주목받던 삼성의 조동찬과 고교 동기인 송광민은 거의 무명으로 지내오다가 지난 시즌 어느 정도 존재감을 형성했고 올시즌 신데렐라처럼 등장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인생사 세옹지마라더니, 송광민과 조동찬의 희비 쌍곡선이 이렇게 교차할 줄이야.

▲ 4월 3일자 조선일보 22면.
그들은 아직도 성장중

WBC 흥행이 프로야구의 흥행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2006년에 경험했었다. 애국심이라는 녀석은 원래 바람과도 같은 것. WBC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피겨스케이팅으로 옮겨탔다. 국가대표 경기에서만 유독 발휘되는 그 신기한 에너지는 어쩌면 국내 프로리그들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2009 한국 프로야구가 인기 있으려면 꼭 해줘야 하는 선수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선수들에 주목한다면 2009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WBC에서는 주춤했지만 다이내믹한 폼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야구를 하는 김광현, 데뷔 때부터 괴물이어서 그 포스를 유지만 해도 엄청난 류현진, 해마다 구종이 늘어가고 있는 완연한 성장기 어린이 윤석민, ‘기계’라는 비인간적인(?) 별명이 딱 들어맞는 김현수, 소속팀 기아의 신데렐라에서 어느덧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 한 이용규. 이들의 절대적인 매력은 이미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성장 중이라는 것이다. 마치 만화 슬램덩크를 보면서 농구 초짜인 강백호의 실력이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향상되는 것을 보고 느꼈던 뿌듯한 감동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다. 이미 최고의 실력을 갖춘 그들이기에 갈고 닦아진 육체와 플레이에서 뿜어나오는 수준 높은 경기력은 오히려 보너스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그들은 ‘쿨’하기까지 하다. 적어도 ‘국가대표’쯤 되면 처절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전쟁같은 게임을 치러야 하고, 인터뷰나 게임에 임해서도 화랑 관창과도 같은 희생정신으로 무장해야 했건만, 그들은 그저 야구를 ‘즐기’려고 했다. 세계최고의 타자인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상대해보고 싶었다는 윤석민이나 자신의 우상 아오키를 뛰어넘고 싶다는 이용규 등을 볼 때면 이들은 무언가 처절함과 비장함으로 가득찬 까치 오혜성보다는 야구를 즐기는 평범한 소년인 H2의 히로가 떠오른다. 미디어가 만들어내고 정치권에서 적극 활용하는 애국심 열풍에 어느 정도 휩쓸리기도 했지만, 인격수양을 위해 야구를 하는 삼미슈퍼스타즈(박민규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야구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있는 선수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9 프로야구 개봉박두!

오랫동안 두산 마운드를 지켜온 랜들이 부상으로 퇴출되었다는 소식과 잠실 개막전에서 유인촌이 시구를 한다는 소식 등 몇몇 안좋은 소식들도 있지만, 이미 와버린 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시작되는 프로야구의 열기를 막을 수는 없다.

팀마다 치르는 133경기, 각 경기마다 승리와 패배와 환호와 눈물이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승리를 염원하기는 선수들이나 팬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것이 백배는 재미있다. 하지만 팬들은 승리하는 게임에서 더 많은 기쁨을 얻지만 선수들은 패배한 게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한 번의 승리와 패배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진정 야구를 즐기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결국 나도 아무래도 이기는 경기가 재미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면 내가 응원하는 기아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세상 모든 곳이 1등만 살아남는 살벌한 곳이 되어 가고 있는데, 특히나 프로스포츠계는 경쟁의 법칙이 심하면 심하지 덜하진 않을 텐데, 그래도 왠지 기아가 꼴찌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적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어디 세상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지는 곳이던가. 이종범이 나와서 병살타를 쳐도, 이대진이 나와서 역전 만루홈런을 맞아도 그들을 볼 수 있는 게 어딘가. 나이든 삼성팬들이 말년의 이만수가 젊은 투수의 강속구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헛스윙을 해도 좋아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나의 우상들이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의 추억이 될 젊고 뛰어난 선수들의 성장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흐뭇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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