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딸이 아빠다. 큰애는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지난해 가을 온나라가 일제고사 문제로 떠들썩했지만 나는 용케 이 문제의 직접당사자가 아니었다. 지난번 시험에서 두 아이 모두 대상에서 제외됐다. 복받은 학부모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한 번 비켜갔다고 끝까지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3월31일 강행된 일제고사에 둘째가 딱 걸려들고 말았다.

나는 2주 전부터 둘째에게 일제고사 얘기를 꺼냈다.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녀석은 그런 시험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워낙 학교시험에 무심한 아이어서인가 보다 했다.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보더니 친구들도 모르고 있다고 했다. 내가 너무 일찍 얘기를 꺼낸 건가? 어쨌든 귀가 솔깃할 얘기를 해줬다. “혹시 그 시험이 있으면 시험보지 말고 아빠랑 체험학습 가자.”

▲ 4월 1일자 세계일보 8면.
쾌재를 부를 줄 알았는데, 둘째의 답이 가관이었다. “아빠, 난 요즘 공부하는 게 노는 것보다 재밌어.”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호기심이 많던 녀석이 요즘 들어 부쩍 이것저것 깨우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디 노는 것보다야 재미있겠어? 다시 2차 공격에 나섰다.

“그건 공부가 아니고 시험이야.”
“시험? 다른 때도 시험 보는데 왜 그날만 시험 안보고 체험학습을 가야 해?”

말문이 막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겨우 찾아낸 답이 이랬다.

“시험이라고 다같은 시험은 아니지. 다른 시험은 신소2(둘째의 별명·‘신비의 소녀 2호’라는 뜻)가 학교공부를 제대로 배웠는지, 부족한 건 뭔지 알아보는 거라면, 이번 시험은 신소2가 전국에서 몇등인지, 신소2 학교는 몇등인지, 또 우리 동네 학교들은 몇등인지를 보는 시험이야. 그런 시험을 한날 한시에 전국에서 다같이 봐서 모두 등수를 매기는 거야. 쉽게 말해 나라 전체가 억지로 서로서로 경쟁하도록 시키는 거야.”

다시 돌아온 답은 이번에도 촌철살인이었다.

“어차피 지금도 친구들이랑 경쟁하는데….”

둘째의 말은 모두 맞았다. 도대체 교육 문제에서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육이 정상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던가 말이다. 그러나 최악보다는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게 옳지 싶어, 틈날 때마다 둘째에게 “학교에서 일제고사 본다고 얘기하더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가정통신문 같은 것도 오지 않았다. ‘이 학교는 제외됐나?’ 그래도 몰라서 둘째에게 다짐을 해뒀다.

“학교에서 일제고사 본다고 하면 아빠한테 꼭 얘기해주고, 또 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줘.”

나는 일주일 쯤 그 문제에 신경을 쓰다가 그만 잊어버렸다. 그런데 지난주 중반께 둘째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빠, 그날 시험보는 게 맞으면, 아빠랑 체험학습 가도 돼? 나, 그런 시험보는 거 너무 싫어. 어차피 내가 뭘 잘 하고 못 하는지는 선생님이 잘 아시잖아.”

신비의 소녀의 신비로운 변신, 이런 맛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가 보다 싶었다.

그러나 둘째는 시험 이틀 전인 3월29일까지도 학교에서 시험이 잡혀 있는지 아닌지 듣지 못했다고 했다. 30일 오후 둘째 학교에 전화를 걸어 담임 선생님을 찾았다. 직접 찾아가기는커녕 전화로라도 인사 한 번 한 적 없는 터라 내심 미안했다. 내일 일제고사가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왜 학부모인 내가 학교에 직접 전화를 걸어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제 아이는 내일 시험 안 보고 체험학습을 가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로 ‘쿨’했다.
“체험학습은 일주일 전에 신청하셔야 합니다.”

나는 경험칙을 들이댔다.
“큰애 초등학교 다닐 때도, 둘째 저학년 때도 전날 신청서를 내고 다녀왔습니다.”

선생님의 ‘불가론’의 근거는 단층대를 훌쩍 건너 뛰었다.
“도교육청에서 진단평가 안 보고 체험학습 가는 학생은 ‘무단 결석’ 처리하라는 공문이 왔습니다. 신청서를 언제 내시든 무단결석입니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말을 받았다.
“도교육청 공문이 법은 아니잖습니까? 선생님께서 무단 결석 처리를 하시든 말든, 그 문제는 체험학습 다녀와서 제가 다시 대응하겠습니다. 신청서를 보낼 테니 팩스번호를 일러주십시오.”
“031-○○○-○○○○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무단 결석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제 아이 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학교 홈페이지에서 체험학습 신청서와 체험학습 보고서, 양식 두 종류를 내려받은 뒤 신청서를 작성해 팩스로 보냈다.

조금 뒤 둘째가 전화를 해왔다.

“아빠, 체험학습 신청서 냈어?”
“응.”
“선생님이 뭐라셔?”
“…… 으, 응. 잘 다녀오래. (중생아, 나무관세음보살!)”
“그래? 그럼 내일 어디 갈 거야?”
“일단 아침에 아빠 사무실에 들러서 회의 좀 한 다음에, 국립중앙박물관 가자. 다녀온 지 오래됐잖아.”
“좋아. 맛있는 거 많이 사줘야 돼.”

그러나 한껏 들떠 있던 둘째 목소리는 몇 시간이 지나 밤늦게 다시 걸어온 전화에서 푹 가라앉아 있었다.

“아빠~, 나 아무래도 내일 시험 봐야 할 것 같아.”
“아니, 갑자기 왜? 누가 뭐라 그래?”
“친구들이 그러는데, 내가 체험학습 가면 교장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을 혼낼 거래. 그러면 선생님도 나를 미워하실 거래. 나 때문에 선생님이 혼나는 거 싫어.”

처음엔 가슴이 콱 막혔다. 몇 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내 먹먹해졌다. 도교육감이, 아니 그보다 훨씬 높고 먼 청와대 주인이 내 아이의 삶을 규정하는 기전이 무시무시해 숨이 막혔지만, 내 아이의 마음씀이 갸륵하고 어여뻐 눈물겨웠다.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 일단 신소2 뜻을 따를게. 그리고 주말에 아빠랑 다시 찬찬히 얘기해보자. 신소2가 시험을 보는 게 나았는지 아니면 체험학습 가는 게 나았는지.”
“알았어. 아빠, 미안해~”

둘째의 목소리가 오그라들고 있었다.

나는 교육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려고 해보았지만, 지난 주말 둘째와 날린 연처럼 멀고 까마득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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