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박원순 변호사를 상징하는 열쇳말은 인권이다. 엄혹한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지침 사건 등 대표적 인권침해 사건에 빠짐없이 관여했다. 90년대 박원순 변호사의 화두는 시민운동이다. 참여연대를 만들었고, 기념비적인 시민운동인 낙천·낙선운동을 이끌었으며,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를 조직했다.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시민운동의 최전성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탁월한 활동가였다.

그는 정치참여에 언제나 부정적이었지만,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시민운동을 탄압하는 이명박 정권에 크게 실망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한다. 결정적으로 2011년 여름, 전임시장이 무상급식을 무산시키려는 정치적 도박을 걸었다가 물러나자 운명처럼 출마를 결심했고, 보궐선거에 승리해 서울시장으로 변신했다.

취임 만 5년을 넘긴 박원순 시장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큰 가시적 기념물에 연연해하지 않고, 시정의 수혜자인 시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폼 잡지 않고, 실속이 있으면서, 고루하지 않다. <가디언>은 거대도시를 이끄는 시장 다섯 가운데 하나로 박시장을 꼽으며, 박원순표 시정의 특징으로 시민참여, 공유경제, 그리고 복지 정책을 거론했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때 병원 정보를 공개하면서 보여준 단호한 태도는 중앙정부의 무능과 대비되어 시민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사태 직후에 박시장의 대선후보 지지율도 가파르게 올라 잠시나마 야권 선두 자리를 차지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5일 오후 도시농업 시범마을로 선정된 서울 종로구 행촌 성곽마을 일대에서 열린 '도시농업축제 한마당'을 방문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C) 연합뉴스

그렇다고 다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장일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박 시장의 최근 행보는 몇 가지 점에서 아쉽다.

첫째, 시정 성공과 대선준비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 둘은 분리된 것도, 선택할 일도 아니다. 박 시장 스스로 최근에 "나를 서울시정에만 가두려 하지 말라. 서울시정이 서울시정으로만 끝나지 않는 일이 정말 많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그도 둘의 관계를 잘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선출마 의사를 묻는 질문에는 여전히 애매하게 답한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정에 실패하면 대선출마는 어렵다. 내가 시정을 성실히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국민들이 평가하고 판단해 줄 것이다'라고.

더구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서울에서 더 극명하게 표출된다. 대표적인 것이 불평등이다. 대한민국 1%에 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에 살고, 99%에 속하는 사람들도 서울에 산다. 지리적으로도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어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핵심문제인 불평등의 쇼윈도인 셈이다. 따라서 서울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비전과 정책과 메시지는 거의 자동적으로 국가적 의제에 대한 비전이 된다. 대선준비에 누구보다 유리하지 않은가.

둘째, 역할 문제다. 박 시장은 서울시장으로 머물든 더 큰 정치적 역할을 하든 이미 야권의 대표적 정치지도자다. 여당 그리고 개혁을 가로막는 수구세력과 큰 싸움을 이끌어야 한다. 전쟁에 준하는 일이다. 전투는 지휘관의 일이고, 전쟁은 지도자의 몫이다. 지휘관은 전투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지도자는 전체 전선의 성격을 정확히 인식하고, 전략적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국민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이다.

박 시장은 주민참여예산제를 비롯한 창조적 아이디어, 또 여러 아이디어를 현실정책으로 만드는 추진력, 공유경제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는 철학 등 뛰어난 지휘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전투는 지휘관들에게 맡기고 그는 전선의 성격, 즉 한국사회의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전선을 돌파할 방법과 그 결과 우리가 도달하게 될 사회의 상을 제시하고, 그 싸움에 참여할 지지자들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과문인지 모르나 그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없다. 공유경제가 있지만 아직 실험적 단계고, 식자층의 관심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 정체성 문제이다. 혹자는 박 시장이 시민운동가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필자는 오히려 그가 시장이 된 후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지니고 있던 덕목을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많이 버린 것이 문제라 본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던 용기, 낙천·낙선운동으로 부패와 반민주 전력 정치인을 단칼에 날리던 단호함, 삼성의 2인자를 몰아붙이며 주주총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기개가 시장이 된 후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이 흐려지면 시나브로 매력은 사라지고 지루한 행정적 능력만 남게된다.

라과디아(La Guardia) 뉴욕 시장의 정치역정을 보자. 그는 뉴욕 시민들이 '작은 꽃'이라 부르며 사랑했던 사람, "정당과 조직의 벽을 깨부수고 자신의 양심이 가리키는 대로 나아간 사람"(하워드 진)이었다. 그는 하원의원 시절부터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그의 진보적이고 때때로 튀는 행동이 소속 정당인 공화당 지도부와 동료의원들을 놀라게 했고,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지만 그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후에 뉴욕시장에 당선되었고 세 번이나 연임하면서 오늘날 뉴욕의 기틀을 만들었다. 뉴욕 시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마피아와 전쟁을 벌이고, 친서민적인 정책을 추진해 뉴욕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민주당 소속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대해서 공개적인 지지를 보냈다.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다면 당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라과디아가 준 시사점은 둘이다. 하나는 그가 하원의원 시절부터 지녔던 가난한 사람과 약자 편이라는 정체성을 시장이 된 후에도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성공적인 시장이란 유능하고 효율적인 행정가로서의 정체성과 꿈과 비전을 나누는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넷째, 전략의 문제다. 춘추전국시절에 약소국들은 함께 힘을 합쳐 가장 강성한 진나라에 대항하는 합종의 길을 걸었어야 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진나라와 연대하는 연횡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진시황의 제물이 되었다. 지난해 떠돌던 이른바 '문안박' 연대는 연횡책에 가깝다. 강자인 문재인 전대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대선 후보경쟁에서 박 시장을 포함해 비주류 군소후보들이 취해야 할 길은 이와는 달리 서로 힘을 합해 강자에 대항하는 합종책인 것이다. 실제로 2002년에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김근태, 한화갑, 정동영 후보에게 4자연대를 제안했다. 당연히 지지율에서 보나 당내 주류의 배타적인 지지로 보나 절대 강자인 이인제 후보에 대항하는 연대였다. 그런 점에서 박 시장측이 '문안박' 연대에 대해 이렇다할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았던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연횡책이 진나라에 대한 경계를 약화시킨 후 각개격파하려는 의도였듯이 '문안박' 연대는 경선경쟁의 연성화를 노린 것이다. 모든 다자간 당내 경선에서 강자는 언제나 경쟁이 격화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당내 경선이 너무 과열되면 서로 상처를 입혀 누가 이기든 본선이 힘들어진다는 말을 명분으로 삼는다. 당의 중진들은 한편으로는 치열하고 역동적인 경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 과열 경선의 부작용을 피해야 한다는 강자의 논리도 수긍한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노무현 후보는 당내 강자인 이인제 후보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무난하게 질 후보라는 점이 공격의 핵심 포인트였다. 이인제 후보는 무대응으로 일관했고, 당내 중진들은 과열경선부작용론을 꺼내들면서 노무현 후보를 만류했다. 노무현 후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선거인단을 움직였고, 결국 이인제 후보를 무너뜨리고 민주당의 후보가 되었다.

박원순 시장은 보궐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무엇보다 먼저 야당이 의당 이겼어야 할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 무기력하게 패배했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더 큰 선물을 함께 주었다. 희망이었다. 야권이 '좋은' 후보를 낸다면 2012년 대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그 희망이 끝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의 책임은 아니다. 2017년, 국민들이 지난 10년간의 퇴행에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하려면 야권의 지도자들이 분발해야 하고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박원순 시장이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는 그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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