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은 유명한 ‘스타 경제학자’다. 2008년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발언을 자제하지 않는다. 2000년 부시 정권 출범 이후에는 ‘부자 감세’를 주축으로 한 공화당의 경제정책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대선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든든한 아군이다. 경선 기간 동안 버니 샌더스를 비현실적 몽상가로 평가하는 독설을 신문지상에 종종 실었다. 이제 그의 펜 끝은 도널드 트럼프를 향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후보가 된 책임을 언론에 지우고 있다는 거다.

중앙일보 26일자 지면에는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바 있는 폴 크루그먼의 칼럼이 번역돼 실렸다. <미 언론의 양비론이 트럼프란 괴물을 키웠다>는 제목이다. 이 칼럼이 실제 뉴욕타임스 지면에 실린 것은 지난 17일이다. 핵심 내용은 양당제에 기반 한 구조가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언론이 단지 야당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수준 미달의 정치인들을 좋게 평가한 게 트럼프 현상의 한 원인이 됐다는 거다. 폴 크루그먼은 부시 행정부의 ‘부자 감세’를 중산층을 위한 정책으로 포장한 것, 공화당 소속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부족한 식견에도 불구하고 ‘재정전문가’로 평가된 것,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의 사소한 잘못을 문제 삼아 균형을 맞추려 한 것 등을 이런 맥락에서 불거진 언론의 잘못으로 꼽는다. 깊이 있는 분석이나 구체적인 정책 비판 보다는 각 정치세력의 균형있는 보도 배분을 더 중요시 하는 우리 언론 현실에서도 새겨들을 만한 측면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중앙일보 26일치에 실린 폴 크루그먼의 칼럼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현상을 키우는데 언론이 분명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이 사태의 주범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언론권력이 퇴조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붕괴하는 시대에 떠맡을 책임치고는 도널드 트럼프식 정치가 가져올 파국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것은 정치의 문제이다. 폴 크루그먼이 지적하는 언론의 잘못된 태도는 거대한 정치 실패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미국 보수정치의 변화상은 정치적 냉소주의가 대중의 에너지를 등에 업고 힘을 키워온 것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의 요구에 정치는 늘 미봉책으로 응답했고 그 결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외피를 뒤집어 쓴 정치세력의 성장을 요구했다. 정치의 명분은 모두 거짓이며 진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사익추구에 있다는 관념이 정치적 냉소주의의 동력이다. 때문에 여기서 ‘근본적 외피’란 결국 사적이익 추구의 노골화, 즉 어떤 ‘정치적 솔직함’을 추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도적 확장과 금융화로 일관한 빌 클린턴 행정부에 대항해 뉴트 깅그리치가 1994년 들고 나온 ‘미국과의 계약’이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신자유주의-기독교복음주의 동맹 역시 대중의 냉소적 요구에 대한 정치의 미봉적 화답으로 볼 수 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 이후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 위기를 수습하면서 태어난 보수주의 운동인 ‘티파티’는 이런 요구에 대한 보수정치의 최종적인 응답으로 여겨졌다. 티파티의 근본 이념은 “내가 낸 세금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걸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헛되이’란 내가 낸 세금이 나에 대한 혜택을 늘리는 데 쓰이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세금은 오로지 ‘평범한 시민인 나’를 위해 쓰여야지 공적영역에 대한 허망한 투자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즉, 티파티의 이런 태도는 명분은 거짓이고 사익추구만이 진실이라는 정치적 냉소주의의 전형이다.

티파티의 극단적 보수주의 운동은 오바마 행정부에 대항하는 공화당 주류의 정치적 카드를 모조리 소멸시켰다. 오바마케어에 대한 극단적 반발 끝에 ‘셧다운’을 자초해 마지막엔 사실상 백기투항을 하는 길로 가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이 글에서 언급한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괜찮은 정치인이긴 하지만, 결국 티파티가 만든 조건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언론이 식견이 없는 정치인을 잘 포장해줬다기 보다는, 애초에 개중 나은 정치인이 그 정도 수준일 수밖에 없는 환경을 이미 정치가 만들어 놓은 셈이다.

기독교복음주의와 티파티가 근본적 대안이 아니라 일종의 미봉책이었기 때문에 대중은 이보다 더한 존재를 원할 수밖에 없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한 건 바로 이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말하는 정치도 결국 지금까지의 명분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분을 말하는 정치인은 그저 거짓말쟁이이며 최고의 미덕은 무슬림을 입국 금지시키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콘크리트 벽을 세우자고 말하는 솔직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율하고 생산적 결론을 도출해야 할 ‘정치’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즉,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진정한 정치는 없다’고 믿는 편이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가 실제 집권하게 될 경우 그 역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겠지만, 우리가 본 일련의 과정은 정치적 냉소주의가 반복해서 기성정치 밖에서 온 존재들을 무대 한가운데로 호출하는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중앙일보 26일자 12면 기사

도널드 트럼프와 경쟁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역시 정치적 냉소주의를 부채질하는 당사자로 지목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다. 현지시간으로 25일부터 시작되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두고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편파성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버니 샌더스 지지층과의 갈등을 다시 키우고 있다.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 역시 냉소주의적 세계관의 소유자들일 수밖에 없데,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지지층과 다른 게 있다면 ‘진정한 정치는 없다’고 말하는 대신 ‘진정한 정치는 (기성정치가 아닌) 어딘가에 있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DNC의 편파적 경선관리는 이들의 ‘기성정치가 내세우는 명분은 거짓’이라는 의심을 사실로 확인해줬다. 데비 워서먼 슐츠 DNC 의장이 신속하게 사퇴를 결정한 것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힐러리 클린턴 캠프 일부가 위키리크스의 해킹을 ‘러시아의 음모’로 몰아가려는 시도를 하면서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기성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우려가 되는 것은 냉소주의에 기반한 정치가 불러올 재앙이 미국 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의 충격은 냉전 해소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배려를 새로운 시장 개방 압력으로 전환하면서 배가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심지어 WTO 탈퇴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해야 하는 힐러리 클린턴도 일정 수준 이상의 보호무역주의를 말할 수밖에 없다. 애초 위기의 원인이 될 걸로 지적돼왔던 미국의 금리인상, 중국의 성장둔화, 저유가에 더해 유럽 시장의 불안까지 촉발되는 상황에서 미국 행정부의 보호주의적 태도는 자칫 잘못하면 우리 경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굳이 경제적 영향을 따지지 않더라도 정치적 냉소주의가 국내정치에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은 미국 정치가 겪는 곤궁함이 여기서 다시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대중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 기성정치 바깥에서 혜성처럼 나타나는 대권주자, 공정하지 못한 경선관리와 잡음 등은 사실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솔직함’을 표방하며 천박한 메시지를 내놓는 대권주자가 등장할 일만 남았다. 미국 정치의 현실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면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대선을 1년 반 남겨놓은 상황에서 그나마 거론되는 대권주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걸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현실은 씁쓸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