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한국 게이머들을 가장 갑갑하게 했던 이야기는 역시 중독 담론일 것입니다. 1980년대 한국 게임의 초창기 시절 오락실 외벽을 차지했던 ‘지능계발’의 슬픈 카피는 게임에 대한 음침한 시선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이만큼까지 올라온 게임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게임은 중독재이고, 패배자의 유희이며, 불건전한 그 무엇이라는 시선은 떨쳐지지 않았습니다.

‘Play the Game’ 1년 반 동안의 연재는 그러한 부정적 시선을 넘어서기 위한 작은 시도였습니다. 게임을 중독재로 부르는 호명에 맞서 중독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은 결국 중독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으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게임이 그 자체만으로도 오롯하게 21세기 한국 대중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매체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약 40여 개에 걸친, 게임과 게임 저변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로 그 마지막을 고합니다.

게이머 – 대중문화로서의 게임 가운데 서는 주체

게임은 매체입니다.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사회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콘텐츠 안에 투영되고, 이를 통해 다시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Play the Game’이 게임전문 웹진이 아닌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 실렸던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 둘 셋, 홍진호 파이팅!’을 외칠 수 있는 세대와 갑작스런 누군가의 난입을 ‘갱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게임에 대한 담론의 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게임을 다루는 담론의 장이 처한 현실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게임을 오롯하게 게임으로만 다루는 시도들은 아직도 부족합니다. 산업으로서의 게임, 중독재로서의 게임, 수익사업으로서의 게임은 현대 대중문화에서 갖는 게임의 가능성과 역할을 제대로 짚어내기 어렵습니다. 기술발전으로 새롭게 열린 또다른 감성의 가능성을 제때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고스란히 날려버린 채 다음 세대를 맞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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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는 단순한 걱정이 아닌 현실에 다가와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에서 만나는 게임들은 천편일률적인 사냥과 레벨업, 똑같은 게임로직에 껍데기만 바꾼 듯한 스타일로 뒤덮여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느끼고 있을 이러한 현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하겠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것이 게이머에 대한 이야기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머 입장에서의 목소리는 그 비중에 비해 많이 비어 있습니다. 게임 제작의 측면에서는 매년 새로운 해외 도서들이 번역되어 등장하고, 주요 게임사가 운영하는 블로그나 웹진의 기사 등을 통해 제작자의 입장은 논점으로 나타납니다. 학계의 연구 또한 미디어, 서사학 등에서 새롭게 큰 시장을 개척한 게임을 등한시하지 않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게임 문화를 이루는 여러 요소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게임미디어의 수용자, 게이머의 이야기는 다른 입장에 비해 파편화된 채로 흩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스타크래프트>를 만든 것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지만 <스타리그>를 만든 것은 게이머라고 생각합니다. 콘텐츠에 대한 창조적 수용이 내재되어 있는 게임 매체는 영화나 만화 등 다른 매체가 이른바 2차 창작이라 부르는 수용자의 자발적 창작에 의한 문화요소의 형성마저도 매체 안에 품고 있는 독특한 미디어이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문화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그래서 매체 수용자로서의 게이머가 바라보는 시각은 절대 빠져서는 안될 항목이 됩니다. ‘Play the Game’은 바로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저는 기자도 아니고 학자는 더더욱 아니며, 게임 산업에 연관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직업으로서 게임과 무관한 제가 게임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이 글이 게이머의 글임을 말합니다(그래서 이 연재의 저자 설명에는 게이머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게이머, 바로 그 매체 수용자가 바라보는 뉴미디어로서의 게임 콘텐츠가 대중문화 전체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들을 발견하기 위한 작업이 이 연재의 의미였습니다. 게임 콘텐츠가 사회문화적으로 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보기도 했고, 게임이 다른 매체와 갖는 차별점들에 집중하면서 오직 게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제작자나 연구자가 아닌 매체 수용자의 입장이기에 가급적 개발 방법론이나 딱딱한 개념들은 직접 쓰기보다는 맥락 안에 녹여내고자 했고, 미약하나마 게임에 대한 문화적 접근의 방법론을 찾고자 현실 사회 제반의 여러 이슈들과 연관될 수 있는 게임들을 다뤄 보기도 했습니다.

게이머로서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뿐 아니라 곳곳에서 좀더 이러한 게이머들의 이야기가 담론의 장으로 모여들어 정비되고 단단해지는 것이 부정적 인식의 껍질 안에 웅크린 게임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에서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안그래도 상호작용의 매체인 게임인데, 그 게임을 다루고 플레이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또다른 상호작용을 이루면서 게임과 게임을 둘러싼 문화 현상을 담론으로 만들어내는 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더 많은, 더욱 정돈된 이야기가 게임 담론으로 등장해야 하고, 그 중심에는 스스로의 위상을 더 이상 소수의 영역이 아닌 대중문화로서 자리매김하는 게이머가 존재할 것입니다.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대단치 않은 능력으로 긴 연재를 이끌어 오면서 부끄러운 순간도 많았고, 한계에 부딪혀 허덕이던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곳곳에서 보내주신 작은 성원들 덕에 이만큼이나마 달려올 수 있었고, 많은 분들의 도움에 힘입어 연재된 내용을 묶은 게임 비평서도 조만간 출간될 예정입니다. 귀한 지면을 흔쾌히 허락해 주신 <미디어스>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여기저기서 조언과 비판으로 함께 해 주셨던 독자분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다시 온연한 게이머의 삶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스샷 찍을 걱정 없이, 메모할 준비 없이 온전하게 게임 속에 푹 빠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GG!


<플레이 더 게임>

#01-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02-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03-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04-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05-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06-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7- 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

#08- 맞고만 치던 당신, 설날 고스톱 스코어는 얼마?

#09-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XCOM

#10- 새마을운동 게임으로 정신과 이념을 교육한다굽쇼?

#11- 시뮬레이션 게임의 개척자 <심시티>를 통해 본 게임의 재현력

#12- 캐쉬템의 문제, 게임 아이템은 소유 가능한 물건인가?

#13- 아이 위해 쓰여진 이야기 같은 게임, ‘LOOM’의 우화

#14- 천만 직장인의 웃픈 블랙코미디, ‘내 꿈은 정규직’

#15- 오락실의 유산① 게이머에 대한 편견의 시작을 찾아서

서평- <제국의 게임>, 게임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례

#16- 오락실의 유산② 동네고수에서 대도서관까지, ‘보는 게임’의 역사

#17- 오락실의 유산③ 한국 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

#18- 고립된 인간의 표정이 말하는 것들, 워킹데드

#19- 영화 ‘픽셀’, 영화로는 풀어내기 힘들었던 픽셀의 향수

#20- 게임이 무서운가? 근거 없는 게임 포비아 넘어서기

#21- 게임이 묻는다. 전쟁 앞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22- 성장하는 청춘들의 게임 라이프, ‘페르소나 4’

#23- 화성 테라포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UFO: afterlight

#24- 게임이 설계한 세계, 게이머가 창조한 세계

#25- 롤드컵 ‘국뽕’의 양조자를 위하여

#26- 게임탄압 대마왕의 축사, 어떻게 볼 것인가

#27- 마지막 스타크래프트가 우리사회에 던지는 시사

#28- 하루하루 살아내는 우리 삶 같은 게임, 굶지마!

#29- 구석구석 놓인 역사, 게이머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30- 당신은 게임 합니까, 전쟁 합니까

#31- 게이머 이세돌을 바라보다

#32- 1994년 미제사건 찾아가는 형사 게임

#33- 우리는 무엇 때문에 레벨업을 하는가

#34- 모험을 떠나 본 지가 언제였는가, 친구여

#35- 게이머는 젝키 컴백을 ‘발로’ 환영합니다

#36- 남겨진 이들의 숙명, <더 라스트 오브 어스>

#37- 게임을 갬블로, 확률형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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