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가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번엔 207.71점이라는 월등한 점수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보는 이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차원 다른’ 경기 내용이라 그런지, 언론들도 너나없이 대서특필했다.

▲ SBS ‘8뉴스’ 3월 29일치 보도
우리 언론들의 보도는 김연아의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 경기내용, 국민들의 대단한 응원과 관심, 외신의 극찬, 그리고 김연아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전하며 김연아의 성장(혹은 성공) 스토리를 쏟아냈다. 언론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13년여 성장기를 다루면서 11살에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에 뽑힌 천재 소녀와 혹독한 어머니의 훈련, 잦은 부상 등 시련을 딛고 감동의 세계랭킹 1위에 오른 성공기를 다뤘다.

일부 신문들은 사설까지 할애해 김연아에 대한 감동을 절절이 드러냈다. 특히 동아일보는 30일 사설 ‘감동의 김연아, 코리아의 힘’에서 김 선수의 세계신기록에 대해 “그야말로 ‘하면 된다’를 입증했다”고 칭찬한 데 이어 “그러나 세계 최고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면서 “세계 최고의 실력은 끝없는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만 연마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해주었다”고 강조했다.

또 “김연아의 세계 제패에서 우리는 자율과 경쟁의 소중함을 거듭 깨닫게 된다”면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스포츠에서 한국을 빛내는 스타가 잇따라 나오는 것은 스포츠가 기본적으로 최고만이 승리를 차지하는 경쟁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며 “부모의 과보호 아래 나약하게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도 훌륭한 삶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차게 해낸 김연아 선수의 눈부신 연기는 대단한 감동이고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이날 동아일보는 ‘하면 된다’와 같은 ‘새마을운동’ 시절의 ‘최고 제일’식 분석을 통해 한국 피겨가 처한 여러 열악한 상황에 대해 눈을 감았다.

▲ 동아일보 3월 30일치 사설
이에 비해 중앙일보의 경우는 좀더 현실감(?)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날 사설에서 중앙은 “전용 훈련장이 없어 일반 사용자들이 떠난 밤 12시 이후에야 겨우 훈련에 임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연습 환경을 감안할 때 김연아의 이번 우승은 기적 같은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또 중앙일보는 “가정에서 제 역할을 못한 데 대해 “남편과 연아의 언니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고 한 김연아 어머니의 말에서 딸을 세계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한 가족의 고초를 읽을 수 있다”고 한 후 “주변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며 “스포츠매니지먼트사는 김연아를 위해 발벗고 나서서 세계적 코치인 브라이언 오서를 캐나다에서 영입했다”고 치켜세웠다.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일보 사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천재성과 훈련, 가족의 희생 이외에도 ‘엄청난 돈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스포츠산업의 시스템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다.

▲ 중앙일보 3월 30일치 사설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 박미희씨는 지난해 7월 펴낸 책 <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에서 김연아 선수가 천재로 주목받던 주니어 시절에도 훈련비를 감당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는 이야기, IMF가 겹치면서 은퇴를 생각했다는 이야기 등을 담기도 했다.

김 선수는 국내에서 후원업체를 구하지 못해 대한빙상경기연맹의 후원금과 자비로 훈련을 이어오다가 지난 2006년 5월 미국계 스포츠마케팅 그룹과 계약을 했고, 시니어 무대를 준비하며 그해 5월 캐나다에서 해외 전지 훈련을 가졌고 같은해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6~2007시즌과 2007~2008시즌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연거푸 1위를 차지했다.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피겨 선수로 자라나려면, 여느 비인기종목 선수들의 설움을 그대로 밟아야 한다. 주니어급은 기업 등의 후원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이고, 따라서 코치 비용와 국제대회 출전비, 의상비, 훈련비, 안무 지도비 등 ‘억’ 소리나는 비용을 개인이 알아서 충당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언론들이 쏟아놓는 ‘하면 된다’는 보도들은 과연, 수많은 꿈나무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희망’으로 들릴 수 있을까. 왜 김연아 선수와 동갑내기이자 국내 랭킹 1위인 김나영 선수(인하대)는 이번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직전 시차적응과 빙질적응이 시급했는지, 그래서 그가 왜 예정된 훈련을 모두 치르는 강행군을 펼쳐야만 했는지, 우리 언론들은 궁금해 하지 않았다.

한 선수의 위대한 성취는 많은 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지만, 그가 이룬 꿈은 개인적 노력과 ‘투자’ 말고는 아무 대안이 없는 한국 비인기 종목의 스포츠 시스템, 나아가 한국사회 전체 시스템의 척박한 현실을 가린다. 언제까지 모든 스포츠 선수가, 아니 온국민이 라면 먹고 뛰었다는 임춘애 선수(86 아시안게임 육상 금메달리스트)를 성공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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