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열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새누리당 한선교의원이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에게 호통 치며 남긴 명언영상 (영상링크)을 뒤늦게 봤다. 2분 남짓한 동영상에 주옥같은 언질들이 담겨있었는데, 유난히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지들 마음대로 만드는’ EBS다큐프라임과 지식채널e가 ‘좌파의 잘못된 사관을 아이들에게 무자비하게 집어넣고 있으며, 그걸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과연 이게 민주주의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한 말이다.

한의원의 말은 지난 5월 EBS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된 ‘민주주의’ 시리즈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명언에 앞서 이미 한 보수단체의 토론회에서 해당 프로그램이(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체제적 이념과 인민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내용이라고 비판했던 내용과 맥이 맞았기 때문이다. (기사링크)

그의 발언 중 정점은 EBS는 어디에도 간섭을 안 받는 그런 매체가 되고 있으니 교육부에서 EBS를 통제 아래로 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아나운서 출신인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자체도 할 말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 다음에 계속 이어진 공영방송계 관련 이슈들은 한 의원이 왜 방송에 대한 ‘통제’를 언급했는지 추론 가능한 근거를 충분히 제공했다.

하 수상하게 정치계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방송개입의혹들 속에서도 긍정적인 소식이 들렸다. 공영방송 역할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이 ‘공영방송지배구조개선 법률안’을 공동발의한다는 기사였다. 법률 내용상에선 현재보단 조금 구성면에선 긍정적인 개선이 있는 내용으로 보였는데, 문제는 제안하겠다는 법률의 이름이었다. 물론 한 단체나 기관의 ‘지배구조’를 언급할 때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영어표기로 이해관계조정 및 운영메커니즘을 의미하는바, 공동발의안에서도 사업자와 종사자의 권한분배가 다뤄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배’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강압성에 의해 누가 공영방송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과 동시에 결국 공영방송은 국민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단체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았다. 역시 이들의 조항에선 국민들의 참여보다는 조직내부개선이라는 내용만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 공영방송체계와는 너무 다른 접근방식이자 태도이기에 독일공영방송조직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공영방송 조직, 권한과 의결권의 분할

독일에서 공영방송을 지칭하는 단어엔 ‘법률상의 공공성’(Öffentlich-rechtlicher)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 독일 공법상에서 ‘법률상의 공공성’을 기능하도록 하는 방식은 공공기관(Anstalt des öffentlichen Rechts)의 유형에 따라 다르다. 그 중 공영방송사는 법적ㆍ행정적으로 국가에서 분리되어 있는 단체로 운영되는 단체다. 재정적 독립은 방송수신료를 통해 가능하며, 이 역시 국가의 개입이나 특정입장이 반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별도의 기관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공영방송사에서 최종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개념인 ‘공공성’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방송과 텔레미디어에 대한 주(州)간 협약(RStV)에 명시된 공영방송의 임무(Auftrag)로 간략하게나마 독일방송에 부여된 공공성의 의무를 살펴볼 수는 있다. 해당조항(§11 (1), (2))에 따르면 공영방송은 프로그램(공급품: Angebote)의 생산과 전파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과 여론형성 요소의 매개체(Medium)로써 기능하고, 이를 통해 민주적ㆍ사회적ㆍ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명을 가진다.

이를 위해서 공영방송은 삶의 모든 분야(Lebensbereichen)에 대한 통찰(Überblick)을 제공해야 하며, 독일연방과 유럽통합 촉진을 위한 임무와 국제이해를 높이는 임무도 부여받는다(1). 또한 공영방송은 보도의 객관성(Objektivität)과 공정성(Unparteilichkeit)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프로그램의 균형성을 고려해야 한다(2). 내용상에서 독일 공영방송의 의무는 국내 공영방송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지만 이를 보장하는 장치의 유무로 인해 방송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공영방송의 내부기관 역할은 공영방송사마다 명칭이나 역할, 인원구성방식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큰 틀 내에서는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바로 특정한 개인에게 많은 권한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독일 공영방송 내에서 운영되는 의사결정 및 권한분배기관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방송위원회(Rundfunkrat)는 방송사 내부에 설치된 최고 의결기관이자 감독기관이다. 이들은 RStV에 명시된 공영방송의 본연 역할들을 감시하며, 내부평가 및 감시활동을 위한 프로그램 모니터링 결과, 사업추진 및 경과평가, 미래전략 평가 및 의결, 내부규정/예산안 의결 등의 승인권한을 가진 단체다. ARD는 ‘프로그램자문위원회’(Programmbeirat), ZDF는 ‘텔레비전위원회’(Fernsehrat), DRadio는 ‘라디오위원회’(Hörfunkrat)로 불린다.

방송위원회 설치 및 운영방식은 ARD와 ZDF, DRadio가 약간씩 다르다. ARD는 9개 회원사들의 방송위원회나 운영위원회의 위원장 9인으로 운영되며, das Erste채널과 3sat, KiKA, phoenix채널 운용을 위한 사업제안 및 권고안들을 작성하고, 방송프로그램관련 이슈들을 다룬다. ZDF 텔레비전위원회(Fernsehrat)는 의견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정치인/정당인/정부인사 외 사회각계 집단의 대표들로 위원들을 구성한다. 기존 77명에서 2016년 1월부터 발효된 17차 RStV 개정에 따라 60명으로 줄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원회는 독일 내 방송위원회 중 가장 큰 규모를 갖추고 있다. 텔레비전위원회는 ZDF의 운영지침을 감독하며 방송사 내부규칙 제정 및 개정 의결, 연간예산과 특수예산 승인 및 운영위원회 위원 추천, 최고운영자 선출과 해임에 대한 권한도 갖고 있다.

ARD 프로그램자문위원회(ARD 홈페이지)

DRadio 라디오위원회의 위원 구성은 각 주(州)정부에서 파견한 인사 16명 및 주(州)별 특성에 따라 할당된 단체 대표 21명 등 총 40명으로 조직된다. ZDF와 DRadio의 방송위원회 위원 선출에는 여성선출에 대한 특별조항이 적용되어 1개 단체 또는 기관에서 2명 이상 파견 시 최소 1명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다음으로 운영위원회(Verwaltunsrat)는 공영방송사 내부 제2의 감독기관이자 의결기관으로, 계약이나 법률분쟁과 관련하여 방송사를 대표하는 단체다. 재정활동과 관련하여 공영방송사의 최고운영자에 대한 활동 감시, 최고운영자 후보 추천 및 선임/해임 제안 등의 활동을 펼친다. 예산활동 감시는 최고운영자가 제출한 예산서를 방송위원회 의결에 앞서 검토하고, 최종승인을 위해 1차 의결을 하게 된다. ARD는 회원사의 연합이기 때문에 별도 운영위원회가 없다. ZDF 운영위원회는 ZDF협약에 따라 14명의 운영위원들이 5년 임기로 활동하게 된다. 운영위원의 구성은 주(州)정부들의 선출한 인사 5명과 연방정부 선출 1명, ZDF 텔레비전위원회 추천인사 8명이다.

ZDF 최고운영자, 텔레비전위원회, 운영위원회 소개페이지(ZDF 홈페이지)

ZDF 텔레비전위원회 위원도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추천이 가능하며 운영위원으로 선출될 경우 ZDF 텔레비전위원회 위원직은 상실된다. 원칙적으로 14명 구성이지만 적절한 인사의 부재나 선출자가 없을 경우에는 전체인원을 축소한 상태에서 활동하게 된다. DRadio 운영위원회는 DRadio운영규정 §24에 의거하여 8명으로 조직되며, 위원들은 주(州)정부 협의를 통한 3명 선출, 연방정부 파견 1명, ARD와 ZDF 각각 2명 파견으로 충당되어 5년의 임기로 활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고운영자(Intendant)는 공영방송사를 대표하는 인사로 방송사의 기본전략을 수립하고 운영계획의 구체화와 중ㆍ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과 예산결산 내역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도 수행하지만 운영위원회와 방송위원회의 결의 없이는 독자적인 집행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공영방송사 내에서 최고운영자 역할은 단독책임으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권한은 상대적으로 적다.

모든 활동에 대해서 운영위원회와 방송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고, 이들의 결정에 따라 임명과 해임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ARD의 최고운영자는 ‘주(州)미디어청 연합’(die medienanstalten)의 대표이기 때문에 다른 방송사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채널 운용에 대해서는 das Erste와 관련해 ‘프로그램디렉터’(Programmdirektor)를 선출한다. 프로그램디렉터는 ARD회원사의 의견조율을 통해 채널을 편성하게 되는데, 이 합의도출이 불가능할 경우 ARD협약에 따라 회원사들에게 의무를 분담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만약 프로그램디렉터가 제안한 의무를 회원사가 수행하지 않을 경우 동일 조항에 의거하여 배상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프로그램디렉터는 회원사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에 따라 선출되며, 2년 임기로 활동한다.

ZDF 최고운영자는 ZDF 운영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ZDF 텔레비전위원회의 5분의 3 이상 결의가 있을 경우에 임명된다. DRadio 최고운영자 선출도 ZDF의 과정과 동일하지만 정족수는 3분의 2로 다르다. ZDF 최고운영자의 해임은 ZDF 텔레비전위원회와 ZDF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한다. 해임절차는 운영위원회에서 최고운영자 해임건의를 텔레비전위원회에 제출하고, 텔레비전위원회의 5분의 3 이상 동의가 있을 경우 결정된다. DRadio 최고운영자 역시 동일한 절차를 거치며, 3분의 2 이상의 동의로 채택여부가 가려진다.

공영방송은 누가 ‘지배’ 하는가?

우리나라 상황에선 아직까지는 권한이 집중된 방식으로 조직개편방안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독일 공영방송사들에 설치되어 있는 조직들처럼 사회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장치는 전무하다.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지금의 개혁안은 큰 의미가 없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독일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이 사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공영방송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지하고 법안마련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좀 더 많은 다양성과 사람들이 참여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옳다. 공영방송구조는 국회구성처럼 의석을 두고 싸우는 자리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며, 공영방송을 지배하는 주체는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공영방송을 ‘통제’해야 한다는 위험한 발상, 그리고 그 발상을 가능하게 한 구조가 더 이상은 유지되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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