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고들 하지만 아직 1년 6개월 동안은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힘을 발휘할 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을 포함한 신문 지상에서는 박근혜 정권은 이미 ‘죽은 권력’이나 다를 바 없다.

맨 먼저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은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18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처가의 부동산을 진경준 검사장 스캔들의 당사자인 넥슨이 매입한 정황을 보도했다. 당시 우병우 수석은 상속세를 내지 못해 거액의 가산세 등을 물어야 할 처지였는데, 이 거래로 ‘가문의 골칫거리’가 단박에 해결됐다는 거다. 이 보도를 시작으로 언론들은 그동안 관가에서 떠돌던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온갖 ‘카더라’들에 대한 취재 경쟁을 시작했다. 20일 신문 지면을 보면 이 문제가 그야말로 ‘일파만파’가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관련 의혹을 1면 톱에 배치한 신문들

조선일보는 이날도 1면 톱에 이 문제 관련 기사를 배치했는데, 넥슨이 당시 부동산 거래 과정에서 중개를 한 업자가 계약 당시에 입회하였음에도 당사자 간 거래로 처리한 정황이 밝혀졌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 의혹은 한겨레 역시 19일자 지면을 통해 보도한 바 있다. 조선일보는 거래 당사자들이 중개인의 도장을 계약서에 찍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해 ‘다운계약’ 등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우병우 민정수석과 관련한 의혹을 말하자면 경향신문이 제기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경향신문은 우병우 민정수석이 검찰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최근까지 ‘정운호 게이트’로 논란에 휘말렸던 홍만표 변호사와 함께 2인조로 변론을 해왔다고 보도한 바 있다. 19일 지면에서 경향신문은 우병우 민정수석이 이를 통해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회장에 대한 변론을 했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우병우 민정수석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경향신문에 대한 법적조치를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보도는 20일 지면에서도 이어졌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당시 홍만표 변호사와 ‘도나도나 다단계 사기 사건’에 대한 공동변론을 맡았고 수임료 5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보도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홍만표 변호사와 사실상 2인조를 이뤄 전관예우를 통해 당시 사건을 ‘싹쓸이’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인데, 홍만표 변호사가 ‘몰래 변론’ 등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우병우 민정수석에게도 마찬가지의 ‘의심’을 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게 경향신문 기사의 핵심 취지다. 경향신문은 아울러 우병우 민정수석이 ‘정운호 게이트’의 핵심 당사자로 등장하는 법조브로커 이민희 씨의 운전기사 발언을 통해 두 사람이 평소 알고 지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이날 서초동에서 “홍만표 변호사가 대형마트라면 우병우 변호사는 SSM정도 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보도한 것 역시 경향신문이 전제하는 정황의 근거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동아일보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진경준 검사장의 비위 사실을 알고도 내부 감찰에 넘기지 않고 사실상 승진을 시켜줬다는 의혹을, 한겨레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아들이 의무경찰 복무 2개월 만에 이른바 ‘꽃보직’으로 불리는 서울지방경찰청으로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전출됐다고 보도했다. 우병우 민정수석을 둘러싼 ‘뒷말’들이 그동안 끊이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언론의 ‘우병우 관련 의혹’에 대한 경쟁적 보도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문제들은 박근혜 정권의 국정장악력을 거의 붕괴 수준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청와대의 대응을 보면 이런 정황이 매우 분명하다. 청와대는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문제에 대해 북한과의 안보문제를 들먹이며 국정을 흔들지 말라거나 확인이 안 된 의혹제기로 사회 갈등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안이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식의 성의없는 해명은 이 의혹에 대응할만한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는 상태로 공보라인이 방치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청와대 참모진이 이런 식으로 마비된 것은 그만큼 우병우 민정수석의 힘이 강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어찌 감히’ 정권 실세가 연루된 문제에 대한 해명을 한낱 청와대 대변인이 함부로 하겠는가. 이렇게 되니 본인의 해명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 말고는 청와대가 그야말로 꼼짝을 못 한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너무나 큰 권력을 갖고 있는 게 오히려 정권의 정치적 리스크 관리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청와대가 특정인에게 너무 큰 권력을 보장해준 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 이날 언론은 일제히 친박 실세의 공천 개입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문제 역시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종편은 TV조선의 보도를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윤상현, 최경환 의원에 이어 현기환 전 정무수석까지 김성회 전 의원에 대한 사실상의 협박에 나섰다는 거다. 김성회 전 의원은 애초 친박 좌장인 서청원 의원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는데, 친박 핵심에 청와대까지 나서 서청원 의원 눈 앞에 ‘꽃길’을 깔아주려고 했다는 게 이 의혹의 전모다.

동아일보는 과거 현기환 전 정무수석을 우병우 민정수석과 묶어 ‘우병우 좌기환’, ‘사정 경호실장, 정치 경호실장’ 등으로 표현한 바 있다. 윤상현, 최경환 의원이 친박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불렸다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청와대는 보도된 현기환 전 정무수석의 발언을 “개인적으로 한 말”이라고 평했고 새누리당 내 친박 강경파들 역시 윤상현, 최경환 의원이 했다는 말을 친한 동료 의원들 간의 대화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해명이 어이없게 느껴지는 건 남들이 쓸 때는 ‘커터칼’ 정도의 무기라도 실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휘두르면 ‘핵폭탄’이 된다는 걸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이러니 평소 권력과 좋은 관계를 맺는데 혈안이 된 보수언론인들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는 20일치 사설에서 이들의 행위가 공직선거법 위반이고 결과적으로 레임덕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대통령이 탈당이라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도 법 위반 여부를 사법 당국이 조사해야 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최경환 윤상현 의원 등에 대한 엄정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터뜨린 조선일보 역시 ‘폭력공천’이란 말까지 써가며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이 집권당 문제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20일 지면에 실린 윤상현, 최경환 의원 및 현기환 전 정무수석 관련 비판 사설

보수언론까지 박근혜 정권의 통치력을 무력화 시키는 데 나선 것은 이제 집권여당을 둘러싼 정치적 국면이 ‘성공한 대통령 만들기’에서 ‘정권재창출’로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시점이 전당대회를 앞둔 민감한 때라는 걸 고려하면 이런 전망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주요 참모 및 측근 그룹이 정치적으로 전멸하고 여소야대 국회에서 당권마저 비박계로 넘어가면 박근혜 대통령은 통치수단을 거의 다 잃게 된다.

친박을 둘러싼 원심력은 강화될 것이고 당내 대권주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계속해서 키워갈 것이다. 보수언론은 ‘보수세력 내 야당’ 구도를 만들기 위해 유승민, 남경필 등의 ‘잠룡’들의 덩치를 계속 키워줄 것이다. 최근 조선일보의 ‘오세훈 띄우기’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 상황의 ‘화룡점정’은 내년 초에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나타나 입을 여는 것이다. 세상은 그를 친박이 만든 대권주자로 부르지만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정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 시대’가 이렇게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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