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출발점에도 서지 못했다

벌이 사라지고 있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태학자들에 의하면 미국에서만 매년 30%의 벌이 사라진다고 한다.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마구잡이 살충제를 써 온 까닭이다. 벌이 멸종하면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1/4이 줄어든다. 여기에 기온상승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줄어드는 경작지를 더하고, 기업형 목축업이 대부분의 곡물을 소비하는 것까지 더하고 더하면 최소 인구의 1/4은 아사로 내몰린다는 뜻이다. 그때가 되면 세계전쟁이 불가피하다. 우리 삶의 양식은 전쟁을 내재하고 있다. 재앙을 막으려면 거대한 전환이 있어야 한다. 마구잡이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엄청난 쓰레기와 폐기물을 쏟아내는 소비체재의 경제와 그것에 길들여진 삶의 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개발과 경제정책의 방향이 바뀌어야 하며 이익률에 사로잡힌 자본의 흐름도 달라져야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전히 핵발전소를 증설하겠다는 권력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언론은 에너지기후 문제를 호도하고 있으며, 정치와 경제 이슈의 뒷전으로 밀려나있다. 총력을 기울여 에너지 전환과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정치, 경제, 문화, 가치 전환에 합의해도 모자라는 시점에도 말이다. 아직 출발점은 저 앞에 있다.

에너지 주권과 시민

사정이 달라지기는 했으되 기후환경문제에 대한 일반적 관점은 위기를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문제해결의 주체를 정부 또는 전문가 집단이라고만 생각하지 자신을 포함한 시민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또는 대의권력이 할 일과 시민이 할 일을 구분하는 것도 문제이다. 주권을 대의할 수밖에 없어 만들어진 대의권력들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사고의 틀이다. 시민은 대의권력을 선출할 참정권만 갖고 대의권력이 빵을 주면 배부르게 먹고, 똥을 싸면 잘못 뽑은 시민들의 책임이니 나서서 치워야 할 밖에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 과도한 에너지 사용의 책임을 시민에게 돌리는 에너지 절약 교육이나 전기세에 적용되는 누진세율을 떠올리면 혈압 약을 먹는 지인들을 걱정해야 할 정도이다.

최근 불거진 교육부 관료의 ‘민중 개돼지론’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람을 대상으로 보고 관찰하고 분석하려는 시각은 언제나 통제와 관리의 힘으로 향한다. 바라보는 자는 그들과 다른 독립적 지위를 구성한다.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고 객관적 사고를 강조하는 근대 과학이 품고 있는 근본적인 관점이다. 이웃을 함께 살고 존재해야 할 사람으로 보면 소통과 합의가 필요하지만 객관만을 강조하면 대상으로 분리되어 남이 된다. 타인은 차가운 관찰과 분석의 시선 안에 갇힌다. 도깨비감투나 절대반지에 대한 욕망은 거기서 싹튼다. 나를 숨기고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는 권력의 시선은 언제나 감시와 통제를 통해 상대의 주권을 박탈하려 한다. 이 지점이 다수에 의한 소수의 지배를 허락하는 후진적인 정치의 온실이자 인간이 자연환경을 훼손할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전문가와 정치인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는 한에서는 시민은 배제될 뿐이다. 송전탑이 지붕위로 지나가도 받아들여야 하며, 세금 낼 돈이 없어 전기가 끊긴 냉골에서 살면서 특정 집단의 이익에 과도하게 편중되거나 경제성만이 유일한 기준인 에너지 생산 체계도 고스란히 승인해야만 한다.

이 책은 민주주의 사회에 걸맞지 않는 권력에 저항하고 대안사회를 모색하기 위해 고투해온 시민학자들의 삶의 이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정리하자면 에너지 문제 해결의 핵심이 좋은 정책만으로도 불가능하며, 대의권력을 잘 뽑는 것으로도 불가능하며, 기술발달과 과학의 발전만으로도 안 되며 오직 사회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가져오겠다는 시민들의 태도와 힘이 있어야만 된다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직언을 우리에게 던진다. 정치, 경제, 사회와 마찬가지로 기후 에너지 분야에서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임을 천명한 것이다.

전환시대의 에너지와 시민교육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전환시대에 살고 있다. 탄소감축을 위한 국제협정이 이루어지고, 지구 곳곳에서 에너지 전환을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근대 산업문명의 폐해들이 인류뿐 아니라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데서 온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이미 인류사회는 화석에너지와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에서 자연에너지로 옮아가는 에너지 전환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다. 에너지 전환은 단지 에너지를 발생하는 방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에너지생산과 결부된 경제, 정책, 기술, 가치, 문화 등의 전환 역시 불가피하다. 연구기관은 물론 교육기관에서 기후와 에너지 문제를 양산한 학문을 퇴출시키고, 친환경기술과 에너지 개발을 위한 학문과 학과를 적극 개설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 출발점에도 서지 못할까.

교육현장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집합적 판단을 대중이라는 언어 속에 가두어 믿지 못할 것이라고 호도하여 가르친다. 다중(Demos)의 힘을 배제해 온 것이다. 그 결과 훈련받은 전문가와 관료들에게 정책을 맡기는 대의정치 외의 정치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일반시민들을 무지한 대중으로 만드는 것은 지배 권력이지 시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주권자들을 노예로 취급하는 대의권력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다음 세대들을 주인대접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육은 다음세대에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려야 할 권리와 완수해야 할 책임을 다하도록 그 능력을 기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에너지 문제도 인종갈등도 전쟁과 산업변화에 따른 노동문제도 다음세대가 고스란히 겪어야 할 문제들 아닌가. 진실과 거짓을 스스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권리를 교육에 돌려주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을 실천할 에너지 시민을 양성하는 것은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이 책은 현황과 쟁점, 대안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질문들을 통해 에너지 문제를 민주주의의 원리를 기준으로 정리하고 있다.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폭력, 권력에 의해 독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을 허락하지 않을 때, 소수를 배제하지 않는 집단적 합의와 결단이 가능할 때 민주주의가 가능하듯이 에너지 전환도 마찬가지임을 세세히 밝혀놓고 있다. 이미 2016학년도 1학기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개설한 <인간과 에너지>강좌의 교재로 쓰였다. 동시에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학생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강생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직접 계획을 세워 음식물쓰레기 재처리설비를 지자체에 설립할 것을 건의했으며, 학교에 태양광에너지시설을 도입할 청사진을 만들기도 했고, 다들 술판을 벌리는 축제기간에 에너지빈민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에 매진했고, 보다 적극적인 NGO 활동을 위한 기관조사를 위해 여러 곳의 기관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수업과 별개로 UN과 국회, 기상청에서 주최하는 기후에너지 포럼에 참가한 수강생도 있다. 실천과 공부가 병행되는 교육방법이 확산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 책을 만든 저자들의 열의 가득한 강의가 있었다. 훌륭한 교육 자료를 만들고, 직접 학생들을 지도해 준 저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다가 올 위기는 기성세대에게는 미래지만 다음세대에게는 현실이다. 많은 학교에서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강의>를 통해 물려줄 미래와 다가올 현실을 살펴보고 새로운 사회를 궁리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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