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레임덕 국면의 광경이다. 그동안 여러 정치적 해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4·13 총선 이후 실질적으로 시작됐다는 주장을 내놨다. 18일 조선일보의 1면은 이러한 전망이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진경준 검사장 사건을 두고 청와대 내 실세 중의 실세라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이름을 꺼낸 것이다.

조선일보 18일자 1면 기사

조선일보는 이날 <우병우 민정수석의 妻家 부동산 넥슨 5년전 1326억원에 사줬다> 제하의 기사를 톱에 배치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가 상속세를 내기 위해 처분하려던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를 먹던 상황에서, 넥슨이 해결사로 나섰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어지는 2면 기사에선 진경준 검사장이 우병우 민정수석과 넥슨을 연결해주고, 우병우 민정수석은 진경준 검사장의 부당한 주식 거래 사실을 눈감아 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검사장 인사를 청와대가 꼼꼼히 검토하게 돼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의혹 제기는 매우 당연하다. 조선일보는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이 건과 관련해 사의를 밝혔다는 내용까지 보도에 포함시켰다.

조선일보 18일자 2면 일부

다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은 조선일보의 사설면이다. 대개 이러한 사건을 보도할 때 보수언론은 정권에 대한 특정한 주문을 사설을 통해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우병우 민정수석의 사퇴나 김현웅 법무부장관 사표의 수리를 요구하는 등의 주장을 내놓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앞의 두 지면에서만 해당 사건을 보도하고 있을 뿐, 그 외의 지면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한다. 첫째는 정권의 반응을 보고 후속보도를 하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실제로 청와대는 조선일보가 제기한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우병우 민정수석 역시 따로 입장을 내고 이것이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였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날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주일 내내 정치권은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건을 갖고 입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다. 이후 조선일보와 정권 간에 항의, 해명, 추가 취재 등등 나름의 소통이 진행된 이후 이 결과에 따라 19일 지면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둘째는 조선일보가 청와대의 아픈 곳을 찌르면서도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려 했을 가능성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은 기사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의 보도는 완전히 사실무근으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우병우 민정수석과 김현웅 법무부장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이런 맥락이라면 조선일보는 나름 정국의 관리를 위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퇴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의 실현을 ‘충심’을 다해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일보의 실제 판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어떤 국면전환이 필요한 시점인 건 사실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최근 공직사회에 정권 말기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른 바 있다. 공무원들의 일탈 행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다. 사드 배치와 관련한 혼란상에도 이러한 문제가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배치 지역을 발표하겠다더니 이를 취소하고 10분 만에 번복한 사건이다. 최대 민감 사안이 전혀 통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보수언론은 국방부 장관이 성주 군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미사일 기지의 위치 등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사안을 발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국가안보와 관련한 ‘콘트롤타워’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일부 부처에 대한 개각을 고려하고 있다는 풍문은 여러 차례 기사화됐다. 그러나 기왕 개각을 할 거면 일부 부처 뿐 만이 아닌 전면적인 개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날도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조선일보 보도를 근거로 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책임자 처벌, 전면 개각을 요구했다. 여기서 주목해볼만한 대목은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정부 권력 기관 도처에 널려있는 우병우 사단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거다.

우병우 민정수석은 앞서도 표현했듯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히며 수사기관, 정보기관 등 다양한 기관의 인사에 개입해온 걸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보수언론들도 몇 차례에 걸쳐 기자수첩이니 칼럼이니 하는 글들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말하는 것은 특히 청와대와 검찰과의 유착관계를 정리하라는 것으로 읽힌다. 이는 최근까지 국민의당을 괴롭힌 박선숙 김수민 의원 사태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어느 정치세력의 유불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청와대의 ‘하명수사’나 정치적 이유에 의한 기획수사가 없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지금의 현실이다. 최근까지 검찰은 롯데그룹 수사를 저인망식으로 진행하면서 ‘전 정권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이러한 의심은 검찰이 청와대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서 수사를 기획 진행한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고, 이런 관점이 성립하는 중심에는 ‘리틀 김기춘’이라고까지 불리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있는 셈이다.

레임덕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에 의지해 정국을 통제하려는 건 권력의 오래된 속성이다. 레임덕의 ‘화룡점정’은 이 수사기관과 정보기관마저도 ‘현재 권력’의 손길을 벗어나 ‘미래 권력’으로 이동하려고 애를 쓰게 되며 결국에는 ‘현재 권력’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사태다. 박근혜 정권은 이런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검찰 등을 장악하는 데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번 보도는 오히려 정권의 그런 시도가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 때문에 사정기관 전체가 흔들리면 지금까지 해온 정치권과 기업에 대한 수사는 온전히 진행되기 어렵다. 이른바 ‘거악’과 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국민여론’을 등에 업는 것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이런 수사들이 오로지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면 중단되는 것이 옳겠으나, 검찰이 분명한 근거를 갖고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라면 대통령이 나서서 방해가 되는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대국민사과와 전면 개각, 아울러 청와대 참모진의 전면 교체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직접 검찰과 국정원 업무에 대한 사실상의 불개입을 선언하고 그간의 의혹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검찰이 진행 중인 수사 사안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할 필요도 있다. 국무총리와 더불어 국무위원을 일괄 교체하되 여소야대 상황을 고려해 일종의 거국내각 구성을 모색해야 한다. 우병우 민정수석과 더불어 이번 사드 배치 문제로 혼란을 야기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등 청와대 핵심 참모진을 다수 교체해야 한다. 그간 문제가 돼왔던 ‘문고리 3인방’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것도 방법이다. 아울러 국회에서 특검을 도입하도록 하고 그야말로 공정하게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수사하도록 여당에 길을 터줘야 한다.

대통령은 지난 3년 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의견이 다른 이들과의 협력이나 이해관계의 조율이 아니라 일방통행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해왔다. 이를 위해 공식 라인이 아닌 비선을 활용한 통치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우병우 민정수석 역시 민정비서관이던 시절 자기 상관이었던 김영한 전 민정수석을 제치고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과 직접 소통해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권력 누수가 시작된 이 시기에 더 이상 유지 가능하지 않다. ‘내려놓아야’ 그나마 살 길이 열린다. 위기에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해법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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