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긴, 복잡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지만, 실체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물론, 알 만하다는 유력 인사들이 포함된, 그러나 알 수 없는 7명의 누군가들이 고발됐다. 이제, 리스트 속 ‘소문’들은 구체적 ‘법문’의 심판으로 넘어간 셈이다.

보도는 여전히 뜨겁고 무성하다. 실명을 감추고 실체를 쓰려다 보니 기술이 부족한 자들은 슬슬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모양새이다. 맞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다. 이미, ‘연예계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언론계에 볼 만한 사람은 다 본’ 리스트이다. 쓸 것이냐, 말 것이냐. 유력인사와 파렴치범을 구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도 길어봤자, 앞으로 며칠이다.

물론, 사람이 개와 늑대를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둠이 거치길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늑대라면 그땐 이미 늦는다. 때가 지나면 알 수 있다는 건 바보들의 결론일 뿐이다. 죽음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당연히, 유력인사와 파렴치범을 정확히 구분하려면, 리스트를 까기보단 수사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언론의 결론이 못 된다. 그건 또한 바보들의 결론일 뿐이다.

그래서 살얼음이다. 눈치를 보며, 다만 함께 시간을 죽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 ‘연장’ 혹은 ‘유예’되고 있긴 하다. 맞다. 이건 보도를 자제하는 자발적 카르텔이다. 언론은 지금 실명 비공개의 강고한 스크럼을 짰다. 그러나 그 팔짱의 틈새로 리스트를 만지작거리며 때를 노리고 있다.

그러니 카르텔이 언제까지나, 스크럼이 끝까지 강고하리란 보장은, 당연히 없다. 얇디 얇은, 걍팍한 공존이 있을 뿐이다. 누구도 장자연 리스트를 감추고 함께 살 꿈을 꾸진 않는다. 제 살길로 떠나기 전의 불안한 의탁일 뿐이다.

언론을 의심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개와 늑대의 시간’에 맞서는 합리적 자세이다. 은폐에도 구분은 필요하고, 개와 늑대의 시간에도 독자적인 판단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지난 일요일 밤 TV는 작금의 상황을 내다볼 수 있는 적절한 교범이었다. 미디어는 이미 ‘개’가 누구이고 ‘늑대’가 누구인지를 알고(적어도 판단하고) 있다. 그렇게 ‘개의 시간’과 ‘늑대의 시간’은 이미 나뉘어져 있다. 개의 시간을 기다리는 쪽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새삼스레 뭘 그러냐고, 잊으라는 주문을 의뭉스럽게 뭉갠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은 완전히 다르다. 다가오는 것은 이미 늑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라며 공포를 확대한다. 얼핏, 판단의 방향도 보였다. 당신은 어떤 판단을 하겠는가?

개의 시간, 새삼스러운 여우비

▲ sbs 스페셜 여우비
일요일 밤(3/22) SBS 스페셜(11시10분)은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 (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이하 여우비)편을 방송했다. 무명은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스타도 아닌 시점에 결혼과 마주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데뷔 10년차 문정희의 시선을 통해 ‘일과 사랑,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배우의 문제를 다뤘다. 여배우의 삶을 여성 보편의 삶으로 끌어내리려는 그 기획의 발상은 별로 나물랄 것이 없었다. 제작진의 예단을 배제하기 위해 여배우를 공동연출자로 삼은 부분이나 여배우들의 인터뷰를 교차 편집한 형식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발상과 형식이 아니라 정작, 내용이었다. 여우비는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 혹은 ‘여배우는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여배우가 자답하는 내용 말이다.

먼저, 분류상 교양에 속하는 시사 다큐의 내용으로 그런 소재가 적합한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연성화에 대한 비판이다.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길게 말하진 않겠다. 어제, 여우비에서 그것은 별로 중요한 지점은 아니었다.

여우비는 말하자면, 보편타당으로 인지되는 어느 여배우의 ‘오늘’에 대한 다른 여배우들의 답이었다. 다시 말해, 어느 여배우의 ‘오늘’에 관해 모든 여배우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그들 모두는 여배우로 살아가며 당연히 겪게 되는 아픔과 불합리 그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대중이 너무 모르거나 혹은 가벼이 본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인터뷰의 구도 상으로 여배우와 대중은 충돌하고 있었다. 실존으로 자리매김한 10년차 여배우가 묻고 있는 답은 결국, 대중이 생각하는 추상으로서의 여배우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내용적 구성과 결말은 타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여배우를 자본주의 소비 욕망의 가파른 에스컬레이터에 태워, 맨 꼭대기 가장 화려한 자리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그것이 대중인가? 물론, 아니다. 가파른 에스컬레이터에 멀미가 난다면 작동 중단을 요구해야지,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어느 여배우가 죽은 직후이다. 그 여배우는 일, 사랑, 결혼, 정년 따위의 그러니까 어느 여배우 혹은 모든 여성이 살며 마주하게 되는 보편타당한 무엇들을 고민했던 것 같진 않다. 확실히. 그렇다면 어제의 여우비는 시점적으로 거짓말이 된다. 여배우들의 오늘에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현재적 시점에선 전혀 구성되질 않는 답이었다.

▲ sbs 스페셜 여우비 출연 여배우들
늑대의 시간,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

비슷한 시간, MBC 시사매거진 2580은 <스타가 되는 길 -신인 여배우와 스폰>(여배우와 스폰)을 방송했다. 내용은 극적이었다. 모든 여배우들의 오늘이 장자연의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귀결이었다.

당신은 연예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여배우와 스폰은 한 번도 솔직하게 얘기된 적 없는, 그러나 존재하는 연예계의 어느 단면을 절개했다. 그것도 가장 적나라한 지표인 단가와 사례를 중심으로. 비로소 장자연의 죽음이 개별성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하는 폭로였다. 지금도 그녀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가는 여배우들이 있단 얘기다.

물론, 미디어가 여배우를 불러내는 방법은 여배우의 개체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문제는 시점이다. 어느 여배우의 죽음을 계기로 여배우의 실존과 여배우에 대한 욕망이 충돌하고 있다. 여우비에서 당신이 받은 온화하고 다행스런 안도감에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미디어가 호출한 특정 여배우의 인간애적인 모습을 보며, ‘개와 늑대의 시간’이 던지는 막막한 불안감을 잠시나마 위로받았으면 다행이다. 다만, 한 가지. 개와 늑대의 시간을 기회로 여배우의 일그러진 현실을 취하되 여배우의 오늘은 다루지 않는 거짓말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리 ‘닥치고 단 것’이 당긴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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