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사 시사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 인터뷰 요청 전화를 받고 거절한 적이 있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었다. 그 사안에 대한 이런저런 배경설명과 함께 다른 인터뷰 대상을 소개해줬다. 그런데 그 방송사는 통화 내용을 녹음해 내가 인터뷰를 한 것처럼 방송에 내보냈다. 그 뒤로 나는 방송기자 전화라면, 잘 아는 후배일지라도 “지금 녹음하고 있느냐”부터 묻는다. 정식 인터뷰를 할 때도 반드시 “내 말을 몇 초로 쓸 건가” 확인한 뒤 딱 그 시간만큼만 말하고 끝낸다. 방송사가 임의로 내 말을 잘라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다.

▲ 고 장자연씨 문건내용을 첫 보도한 지난 13일 KBS ‘뉴스9’
장자연이라는 여성 연예인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었다. 그의 죽음은 개별성에서 벗어나 그의 노동과 성을 착취한 가해자들을 처벌하고, 나아가 거대한 남성 지배이데올로기를 폭로함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을 공개하는 행위는 언론으로선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 보도한 KBS도 “장씨의 명예와 불법행위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공개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KBS의 해명을 믿고 싶다. 나라도 결국 공개를 선택했을 것이다. 정작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진실의 공개가 아니라 그의 죽음을 가십으로 유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KBS의 고뇌에 찬 선택에도 불구하고, KBS의 보도 내용 일부는 지극히 유감스럽다. KBS의 뉴스 예고를 본 장씨 유족이 KBS에 전화를 걸어 “보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KBS가 알권리와 공익 차원에서 유족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라면 유족의 요구 내용도 함께 보도했어야 마땅하다. KBS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족들의 전화 내용 일부(“저희는 문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소각했으니까, 편하게 가게 해주세요.”)를 교묘하게 잘라내서 ‘경찰 수사로 확대되는 것에 대한 당혹감’으로 둔갑시켰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그런 말을 한 건 ‘사실’ 아니냐고? ‘부분적 사실’을 떼어내 전혀 다른 맥락에 갖다 붙이는 건 황색신문(옐로페이퍼)이 활개치던 20세기 초반 미국 언론들이 가장 즐겨쓰던 고전적인 수법이다. 당시 신문들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차안에 있는 부상자를 구조하려고 차 유리창을 깬 것을 재물손괴죄로 만들어버리고도 남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같은 저널리즘 윤리로는 아무리 진실을 말한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 뉴스를 팔려는 선정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같은 ‘선수’도 낚이는 게 방송사 전화다. 선정주의에 희생되지 않으려거든 ‘보이스 피싱’보다 무서운 방송사 전화를 조심하라.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1533호 ‘미디어 바로보기’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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