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제만큼은 정치논리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보-보수 또는 서민-기득권층을 동시에 만족시킨 교육정책 사례가 없었던 우리 현대사 앞에서 머쓱하다. 교육문제는 정작 가장 정치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다. 공공선의 문제이기에 앞서 미래 자원에 대한 분배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한국사회의 교육 갈등이 유별난 것도 교육이 자원 분배의 핵심변수로 작동해온 여태까지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진보와 보수가 그 ‘과거’ 기억을 전혀 다르게 재구성하기에 ‘미래’의 분배 규범을 놓고 ‘현재’의 교육정책을 다투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최근 언론 보도는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었던 정책 분야 전반에서 극단적 찬반 대립이 빚어져온 것을 감안하면 언론의 이런 ‘쏠림’ 자체가 이례적인 현상이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교육정책이 드문 만큼 양쪽 모두로부터 배척받는 교육정책 또한 흔한 것은 아니었다. 평준화, 삼불제, 일제고사 등에서는 쏠림은커녕 회색지대조차 극히 협소했다. 입학사정관제가 진보-보수 양쪽으로부터 회의(懷疑)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 그래서 더욱 이례적이다.

▲ 한국일보 3월18일치 5면 기사

타당성·공정성·신뢰성, 대입제도의 3대 쟁점

그러나 교육정책 논쟁에 있어서 이처럼 낯선 구도가 형성된 건 이 제도가 갖는 역설적 ‘미덕’이기도 하다. 입학사정관제는 진보-보수 진영 모두에게 교육문제를 더는 수사(修辭)만으로 논쟁할 수 없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입 제도를 둘러싼 쟁점은 △타당성 △공정성 △신뢰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양쪽 모두가 가장 앞세운 것이 ‘타당성’이다. 과연 현행 입시제도가 인재를 제대로 선발할 수 있는 변별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공격은 보수 쪽에서 걸었다. 진보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현행 제도를 옹호했다.

현행 대입 제도는 삼불제라는 ‘네거티브 제도’로 요약된다. 보수 진영은 한사코 이들 제도를 반대해왔다. 삼불제 가운데 본고사 금지와 고교등급제 금지는 경쟁력 있는 인재를 선발할 수 없게 하고, 기여 입학제는 대학재정의 자립도를 높여 대학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논리다. 네거티브 제도는 아니지만, 평준화 제도와 내신제는 고교등급제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역시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일부 대학이 음성적 고교등급제와 편법적 본고사로 이들 제도의 무력화를 시도해온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진보 진영은 이들 제도 하나하나에 대해 보수와 정반대의 입장으로 맞서있다. 본고사와 고교등급제를 허용하고 평준화 제도를 폐지하면 대입 전(前) 교육과정 전체가 무한 입시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경쟁력 있는 인재조차 문제풀이 전문가로 낙후시킬 뿐이라는 얘기다. 물론 현행 입시제도가 인재를 길러내는 데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나마 공교육의 완전 붕괴를 막는 최후의 지지대라고 본다. 이들에게 공교육은 명분으로나마, 문제풀이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유일한 기반이다.

그러나 대입 제도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실존적 이해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은 ‘명분의 언어’다. 명분은 대체로 공허하지만, 실리의 이기성을 은폐하는 도구로써는 매우 유용하다. 어떤 제도가 인재를 고르고 기르기에 적합한지를 다투는 일은 어떤 제도가 자신과 자신의 진영에 유리한지를 두고 다퉈야 하는 겸연쩍음을 가려준다. 타당성 논쟁은 공포탄이다. 양쪽이 실탄을 날리는 실질적 1차 전선은 ‘공정성’ 앞에서 그어지고, 중화기를 동원하는 2차 전선은 ‘신뢰성’ 앞에 이르러 다시 그어진다.

▲ 조선일보 3월18일치 1면 ‘뉴스 & 뷰’
진보-보수 모두로부터 불신받는 얄궂은 처지

입학사정관제의 고유함은 이 제도가 타당성의 논란에서 아예 비켜나 있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수능이나 내신처럼 전국적으로 규격화된 평가척도가 아닌 다면적 평가를 통해 학생을 뽑는 제도다. 문제풀이 전문가보다는 창의력 같은 잠재적/미래적 가치를 중시할 거라는 얘기다. 이것이야 말로 한국 입시제도의 고질적 문제로 지목받아온 타당성의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다. 그런데도 진보-보수 모두로부터 불신을 받는 얄궂은 처지다. 타당하지만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문제가 이 제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는 심지어 타당하기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타당성이 명분의 논리라면 공정성과 신뢰성은 게임(경쟁)의 논리다. (물론 이 둘은 ‘정의正義’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정의란 ‘자원 분배’의 이해를 둘러싼 정의다.) 입시제도가 어느 한쪽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공정한 경쟁을 해치지는 않는지(공정성), 정해진 제도의 규칙을 어기고 장난을 치거나, 규칙 자체가 지나치게 임의적이어서 장난칠 여지가 크지는 않은지(신뢰도)가 쟁점이다. 삼불제는 적어도 차별을 제도화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며, 장난칠 여지도 크게 줄여준다. 자신의 우월한 자원이 자녀의 입시에 직접 작용할 수 없는 만큼 기득권층은 불만이다. 그러나 대놓고 드러낼 수 없기에 타당성의 논리로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반대쪽도 타당성의 논리를 앞세워 맞받는다.

입학사정관제가 양쪽 모두에 곤혹스럽거나 불만인 건 바로 이 제도의 압도적 타당성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제도에 대한 논란은 타당성에서 뜸들이지 않고, 공정성과 신뢰성의 촉매작용으로 곧장 발화한다. 물론, 진보-보수(또는 서민-기득권층) 양쪽 모두 이 제도를 불신하지만, 불신의 이유는 사뭇 다르다. 서민들은 무엇보다 신뢰성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다. 가뜩이나 일부 대학들이 현행 입시제도의 틈바구니에서도 고교등급제를 음성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터에 재량권까지 크게 쥐어준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빤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학들의 행태를 봤을 때, 그들의 ‘개과천선’을 전제하지 않는 한 이 제도의 신뢰성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기득권층이 이 제도의 낮은 신뢰성에 불만을 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공정성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이 보기에 이 제도는 ‘너무’ 공정한 것이 문제다. 이 제도가 취지(명분)에 맞게 정교하게 설계된다면 현행 제도보다 오히려 공정성이 높아진다. 그만큼 자신들에겐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현행 제도에서는 자신들의 우월한 자원을 사교육에 압도적으로 투자해 간접적으로나마 경쟁의 우위에 서있다. 하지만 문제풀이식 사교육에 아무리 투자를 하더라도 창의성 같은 잠재적/미래적 가치를 높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저 설계가 허술해 공정성이 낮아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기득권이 진짜 바라는 건 평준화 해체와 고교등급제

설계가 허술하다면 기득권층에겐 현행 제도보다는 유리할 수 있다. 사교육 시장이 좀더 다양해지고 정교해진다면 자신들과 서민들의 투자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고, 그만큼 자신들의 경쟁력 우위도 높아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시간이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다. 자신들의 자녀가 학교교육 외에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은 사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는 자신들의 경제력의 한계가 아닌 물리적 시간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 경우에도 불확실성은 현행 제도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기득권층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대입 모델은 역시 평준화 제도를 해체하고 대학이 자율적으로 고교등급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무한 대입 경쟁의 불확실성을 크게 줄이고 중고등학교 단계에서 일찌감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제도는 현실적으로 이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입학사정관제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현격히 떨어뜨리는 수밖에 없다. 공정성을 떨어뜨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공정성은 제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하지만, 역으로 강력한 시비와 반발에 휩싸일 소지가 크다. 신뢰도는 잘 눈에 띄지 않고 운영의 탄력성이 큰 반면, 가시화되지 않기에 안정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입학사정관제는 어느 쪽으로부터도 믿음과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역시 이 제도의 유일한 미덕은 우리 교육의 정치적 역학구조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는 것뿐이다. 이같은 자기지시적 폭로성은 이 제도가 (명분으로는) 이상적이되 (실천에 있어) 비현실적인 데서 비롯된다. 이 제도를 포기하는 것은 교육에 있어 이상적 지향을 원천적으로 폐쇄하는 일이고, 반대로 이 제도를 선택하는 것은 미래의 자원 분배 정의를 포기하고 교육을 통한 기득권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극대화하거나, 적어도 모든 경쟁자들을 카오스의 세상으로 밀어넣는 일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그러나 너무나 확연한 딜레마의 근본원인은 교육이라는 사회적 공유재가 공동체적 가치 지향이 아닌 자원 분배의 가장 이기적 도구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의 지배질서에 있다. 단언컨대, 이 지배질서를 바꾸지 못하는 한 모든 교육학적 고뇌는 한갓 백일몽일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지배질서를 바꾸기 위해 한국사회가 도출한 가장 유력한 대안은 학벌 기득권을 깨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 대학 서열구조 철폐 제도뿐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한국사회 진보진영조차 대다수가 이 구조의 기득권자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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