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를 두고 뭔가를 가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온하다면, 먼저 망측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그래도 한 번만. 만약, 장자연이 죽지 않았더라면? 한 개인의 삶보다 우선하는 무엇이 없다는 보편타당한 감정으로 다행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연예인의 죽음이 연예계 전체를 설명하는 ‘보통명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연예계는 장자연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우리가 쫒던 욕망의 공동체는 알고 보니 여자 연예인을 성적 도구 또는 상납의 대상으로 여기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수행하는 인종들이었다. 최소한 묵인이 통용되는 공동체였다. 제 ‘꿈을 향해 소리치는’ 자유롭고 화려한 영혼들이 모여 있다는 막연한 은하수에는 젖과 꿀이 아닌 성과 술이 흐르고 있었단 말이다. 구체적으로 추측하되 공개적으론 말할 수 없었던, 진짜 막 돼먹은 어떤 것의 실체와 마주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이 사건을 훑고 있는 기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현장에서 고생하는 기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장자연이 죽기 전까지 당신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나? 고 장자연의 전 매니저였던 유장호의 기자회견에는 족히 300명은 넘어 보이는 기자들이 참석했단다. 그 자체로 뉴스거리지 싶다. 참석자의 증언에 의하면, 일대 장관이었단다.

▲ 지난 18일 유장호씨(가운데 빨간색 원)가 기자회견장에 들어오고 있다. ⓒ송선영

그런데 그 기자회견은 새로운 사실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 채,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는 옛말의 생명력만 다시 한 번 연장한 이벤트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밝혀”지리라던 예측은 3000간다던 주가 마냥 곤두박질치고, 상황은 아직도 증권가 찌라시가 정보를 지배하는 미디어의 난세이다. 기자의 ‘노동’은 이런 국면에서 비로소 ‘노가다’와 교유한다. 몇 개의 쪼가리 단서들을 붙들고, 과잉 인력들이 과장된 발걸음을 갈지자로 꺾어 대고 있다.

임계점을 지나 펄펄 끓는 기사들을 나름 분류해보면 흥미롭다. 우선, 분당경찰서에 일개의 무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리스트가 있다, 없다’, ‘외압이 있다, 없다’, ‘문건이 더 있다, 없다’ 류의 기사들이 기차역 가락국수처럼 쉴새없이 뜨겁게 뽑혀졌다. 양념으로는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분당경찰서 형사과장의 얼굴이 제공되었다.

또 일군의 무리들은 장자연의 소속사인 더컨텐츠 엔터테인먼트를 캐고 있었다. 어제는 강남구 삼성동 40-9번지에 지난 2년간 로비의 창구로 애용됐던 건물이 실재함을 밝혀내는 개가를 이뤘다. 건물의 존재를 전하는 문체에는 고대문화유산 발굴보다 더한 감격과 과장이 묻어있었다. 그 밖에도 찌라시들은 앞 다투어 더컨텐츠 엔터테인먼트의 영업 스타일을 꼼꼼히 검증하고 있다. 전 연예 매니저였다는 이들의 증언이 쏟아지고, 암약하는 익명의 제보원들이 업무 수행의 빈도를 늘리고 있다. 증권가 찌라시의 ‘카더라’성을 확정적 사실로 세탁하여 소문으로 전파하는 역할 경쟁이 뜨겁다.

그리고 또 나머지들은 어디에 있을까? 군락을 이루는 취재를 포기한 기자들은 산개해있을 것이다. 감 있는 몇몇은 2002년도 연예 비리 사건을 캐보고자 검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약은 이는 취재원에게 접근하여 ‘단독’을 따낼 궁리를 하며 전화를 돌리고 있을 테다. 간간히 자신의 성공담을 증언하는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중에는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의 결정적 피의자인 더컨텐츠 엔터테인먼트의 김모 대표가 일본에 있다.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어디가 있을까? 언뜻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만 유독 부족한 게 아니라면, 이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공통적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가 이 정도이다. 이 모든 취재들은 어찌되었건 완결적 역할 분담을 이룰 것이고, 당연히 유기적으로 움직일 테다. 그럼, 이 사건은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까? 현재로선, 장담하기 어렵다. 아니, 아니라는 대답이 더 정직할지도 모른다.

▲ 유장호씨 기자회견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취재진. ⓒ송선영

언젠가를 기점으로 경찰은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명단 수사보단 부정확한 리스트의 공공연함으로 인한 명예훼손을 더 우려하는 듯하다. 1등 신문 조선일보는 문건의 취득 경위 등을 훨씬 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태도의 변화이다. 말하자면, 경찰과 조선일보는 정보 그 자체보다 정보를 둘러싼 환경을 더 중히 여기는 논리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중앙과 동아도 곧 따를 것이다. 정보 그 자체보다 정보의 구성 내용 혹은 정보의 취득 경위를 더 중히 여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피해자와 피의자가 뒤바뀐다. 묘한 일인데 흔한 일이다. 사건 이름에 ‘X’가 붙은 모든 사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정적 징후가 있다. 엔터테인먼트 법학회 최정환 변호사는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폭력 부당행위가 있었다면 형법에 따라 형사처벌 가능성은 있지만, 단순히 성 상납, 여성으로부터 특정한 목적을 얻기 위해 성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처벌하는 법규는 없다”고. 즉, 성상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에 의해 강제로 행해졌다는 것이 입증되어야만 처벌할 수 있단 말이다. 그 견해, 개인적이라고 해도, 중요한 법리 해석이다.

맞다. 맨 첫 단락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수백 명의 기자들이 고생하고 있지만, 장자연의 죽음은 심히 초라한 결론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이다. 유력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리스트는 명예훼손의 덫에 걸려 보도조차 못하고,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산 자는 힘이 막강함으로 장자연의 죽음은 산 자의 힘에 굴복되고, 그렇게 장자연의 죽음은 개별화, 사건화에서 뉴스로서의 가치를 마감하는 상황 말이다.

그럴 리가 있겠냐고, 너무 속단하지 마라. 진실보단 속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미디어를 믿지 마라. 그러면 안된다고. 맞다.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사건의 본질로 들어가야 한다. 보도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맞서야 할 것은 바로 연예인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간결하게 묻겠다. “연예인은 노동자인가?”

연예인은 노동자라는 평범한 사살에서 출발해야 한다. 연예계라고 하는 욕망의 공동체는 없다. 어느 직장인과 다름없다. 제 ‘꿈을 향해 소리치는’ 자유롭고 화려한 영혼들도 사용자의 지휘명령을 받으면서 근무를 할 뿐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 분류상 고용계약의 형식이 아닌 형태의 ‘계약’을 맺을 뿐이다.

연예인은 현행법의 용어를 빌자면, ‘특수고용형태’의 노동자들이다. 법원의 판례를 봐도 크게 튀지 않는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그 계약 여부의 형태(고용계약, 도급 계약 등)는 상관을 두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는지의 여부이다.

‘임금을 목적으로 한 종속 관계’라는 표현이 특수고용형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둘러싼 쟁점이긴 하지만, 해석은 결국 진전할 것이고 ‘사용자의 사업을 위한 것으로 그 사업에 밀접하게 결합’된 이를 노동자로 봐야 할 것이다.

장자연이 노동자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헌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다. 노동3권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유장호의 기자회견에 허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뒷소문 뒤지는 출혈 경쟁 안 해도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노동부로 뛰어가라. 어느 연예인의 의문스런 자살이어서가 아니라, 어느 여성 노동자가 겪어야 했던 야만의 상황으로 이번 사건을 촘촘히 하라! 장자연 리스트 아니 장자연이 작성한 미확인 자필 문건의 진짜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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