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어느 연예인이 죽었다. 그 죽음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연예계를 사회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개별자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진즉에 수행됐어야 하는 일이었다. 여긴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의 압도적 1위가 연예인인 나라이다. 채 10살도 되지 않은 꼬맹이의 웨이브를 섹시하다 칭하는 천박한 욕망의 공동체, 구준표 얼마 벌었나 따위로 미디어가 도배되는 환상의 물매가 일상적인 사회이다.

어느 연예인의 ‘미확인 자필문건’은 연예계를 툭 끊었다. 연예계를 비판하는 이야기들은 대개 비슷했고, 그에 대한 반응도 거의 유사했다. 하지만 연예계만이 우리의 욕망과 환상을 대신해주는 상황에서, 비판과 상관없이 연예계는 계속 번창해왔다. 이번 주말 기획은 ‘장자연, 연예계 그리고 미디어’이다. 누구나 연예인이 되고픈 욕망의 공화국에서 연예인이 죽는 현실에서 연예인의 노동자성, 강고한 신데렐라 신드롬을 시원하게 뚫는 낯선 춘향이의 재림 그리고 조선일보의 문제를 다뤘다. 별로, 말랑하진 않다. 말랑하기 어려웠다.

옥 안에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채 소복을 입고 칼을 찬 춘향이가 앉아 있다. 오매불망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올 이몽룡을 기다린다. 변사또는 춘향을 설득, 회유, 폭행도 해보지만 춘향이는 꿈적도 않는다. 대강 이것이 누구나 알고 있는 <춘향전>의 전통적인 내러티브이다. 하지만, 발상을 조금만 전환하면 다양한 <춘향전>이 완성된다.

사례1. 이몽룡은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고, 결국 변사또는 끈임없는 회유와 폭행으로 춘향이를 괴롭히는 억장 무너지는 새드엔딩.
사례2. 암행어사 이몽룡 따위를 눈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변사또와 맞서 싸워 승리하는 춘향이의 모습을 그린 역동적인 해피엔딩.

이건, 공분일 뿐

성상납과 술접대, 그리고 폭행과 감금 등으로 인한 신인 여성 연예인의 자살에, 누가? 우리 모두가, 일단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공분한다. 너나할 것 없다. 좌우도 없다. 위아래도 없다. 장자연씨의 죽음은 한 여성의 자살이 아니었다. 우울증으로 인한 연예인의 극단적 선택으로만 보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녀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장자연’을 이야기한다. 이름조차 생경했던 신인 연기자 ‘장자연’은, 하루 사이에 이름을 남겼다. 그것도 죽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죽음에 숨겨 있는 ‘타살적 징후’를 둘러싼 공방과 진실 여부가 연일 화제다. 이처럼 한 신인 연기자의 자살은 ‘추모’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몸담았던 연예계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신인 배우들을 향한 폭행, 여성 연예인의 성상납과 술접대. 단어만 보고 있어도 억장이 무너진다.

처방전만 쥐고 있는 꼴

공분한 이들은 연예인 인권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연예매니지먼트사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정부당국도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연예매니지먼트업 등록제를 정부입법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노예계약을 막기 위해 표준계약서 도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사건만 터지면 ‘○○○법’이라며 호들갑만을 떨던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일단은 최소한의 선의로 믿어볼 맘이다.

허나 연예계의 천박한 먹이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제시된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공허하다. 틈새가 있고, 공백이 있다. 최근 전지현 휴대폰의 복제, 수호라는 가수에 대한 기획사의 폭행과 감금 사실 등이 밝혀졌다. 전자는 ‘스타’ 전지현이라는 이유만으로 언론매체에서 주요하게 다뤄졌지만, 수호라는 ‘무명’가수의 사연은 스포츠신문과 인터넷연예뉴스 몇몇의 가십밖에 되지 못하였다. ‘스타’와 ‘무명’의 차이도 있지만, 사건 이후에도 연예계는 요지경이다. 단연 적나라한 예는 ‘연예인 X파일사건’. 지난 2005년 1월, 연예계를 강타했던 ‘연예인 X파일’ 은 광고기획사의 연예인 데이터베이스로 유명 연예인들의 사생활, 연예인과 스폰서와의 관계 등이 너저분하게 담겨 있었다. 당시 해당 연예인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연기자 노조의 강력대응, 그리고 문제의 광고사를 상대로 한 연예계 역대 최대의 법률 소송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익숙하게도 연예인 X파일 사건은 하루 밤 밀물과 썰물처럼 잊혀져갔고, 다만 연예계만이 당사자의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한 셈이라고 자위했다.(“연예인 인권을 바라보는 몇 가지 쟁점들” 이동연, 참고)

▲ 아시아경제 1월21일자 26면

결국 현재 들썩이는 연예계의 추악한 단면은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연예계의 폭행, 성상납, 술접대 등과 사생활 침해와 노예계약 등 보편적인 인권을 위협하는 사례는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있다. 물론 세상을 향해 공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왔던 개선방안과 치유책은 2002년 연예비리 사건 때도, 2005년 X파일 사건 때도, 그리고 2009년 지금에도 여전히 ‘개선방안’으로만 남아 있다. 처방전은 있는데, 약국에서 약을 안주는 경우라 해야 하나. 여하튼 ‘자격증제, 표준계약제도입, 매니지먼트등록제’ 등 처방전은 그저 손에 꼭 쥐고 있을 뿐, 병세는 악화된 꼴이다.

격하게 아낄 때

더 이상은 물러설 곳도 없이 지금이다. 연예인 스스로가 연예계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자성과 당사자의 소중하지만 보편적인 인권에 대해 격하게 아낄 때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소홀히 했던 점에 대해서는 연예계의 검은 고리가 너무 끈적거렸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로 하자. 2005년, 연예인 X파일 사건 때에도 문화운동 진영에서는 ‘연예인 인권선언’을 주문하면서, 당시 전규찬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소장이 토론회에서 “‘연예’의 화려한 듯 하지만 우울한 감옥에서 문화의 즐거운 공동 놀이터로 탈주하라! 감금의 벽을 무너뜨리고 일상의 관계로 내려오라!”고 외쳤던 연대의 소리에 뒤늦게라도 화답을 하자.

거지차림을 마다할 암행어사가 2009년에 있을 리 만무하기도 하지만, 소복입고 칼 차고 앉아 그이만을 기다리는 춘향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암행어사다운 암행어사는 없고, 변사또들만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경찰은 리스트가 있네 없네 말을 번복하고 나섰고, 몇몇 일간지에서는 ‘괴담’이라는 여론을 만들어내며 사건을 샛길로 몰고 간다. 그렇다. 연예계도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럴싸한 암행어사 찾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그럼 춘향아! 칼차고 앉아만 있을 것이냐, 변사또의 추악한 술책에 넘어갈 것이냐.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없다. 해법은 춘향이들의 저항이다. 암행어사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다 변사또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저잣거리로 나와 놀이판을 벌이자. 비록 눈물이 흐를지언정 대중들의 박수와 환호가 있고, 혹시 공길과 장생이를 만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 원고 중간에 <춘향전>의 내러티브를 토대로 비유했지만, 춘향이를 순정을 바친 여성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 암행어사는 상식과 양심이 통하는 권력으로, 변사또는 추악하고 천박한 자본의 욕망과 리스트의 그이들로 해석했습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봐, 그리고 그 오해 속으로 휘말리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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