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원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은 지난 3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인수합병 승인을 안 해줄 것이다. 그래도 SK텔레콤이 인수합병 신청을 했으니 절차는 밟아주겠다는 것이 미래부의 입장인 걸로 생각된다. 만약 합병 승인을 해 주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1인 시위를 해서라도 이 일을 막는 데에 앞장설 것이다.” 그는 인터뷰 당시 KT 사외이사였고, 석 달 뒤인 6월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가 1인 시위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4일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정재찬)는 SK의 CJ헬로비전 주식 취득과 합병을 모두 불허한다는 내용의 심사보고서를 SK에게 전달했다. 이튿날 SK텔레콤은 공정위에 유감을 표하며 “후속대책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CJ헬로비전은 “케이블 업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최악’의 심사 결과”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의견 청취, 전원회의 결정,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심사가 남았으나 결론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없다. 공정위가 보고서를 내놓은 4일 온종일 ‘조건부 승인’이니 ‘사실상 불허’니 같은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상황은 이렇게 정리됐다. SK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은 불발됐다.

SK와 CJ는 오너 리스크가 있는 탓에 박근혜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나 결국 밀려났다. 처음부터 진영은 SK 대 반SK로 촘촘하게 짜여졌다. SBS는 쉴 새 없이 SK와 CJ에 비판적인 리포트를 쏟아냈고, MBC와 KBS도 보조를 맞췄다. KT와 LG유플러스는 언론 관련 학회를 열고 광고를 집행하며 끊임없이 여론을 만들어냈다. 청와대에 SBS 출신인 김성우 홍보수석, KT 사외이사 출신인 현대원 미래전략수석의 존재도 이번 심사의 큰 변수로 꼽혔다. 이번 결과를 두고 ‘SBS와 KT가 SK와 CJ를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한 가지. 이번 판에 승자는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SBS는 협상상대가 덩치를 키우는 것을 막았고, KT는 최대경쟁자의 출현을 막아낸 것뿐이다. 시장은 그대로다. 인수합병 저지에 성공했지만 지상파는 ‘저무는 갑’이고, KT와 LG유플러스는 이번 공정위 심사결과에 발목을 잡혔다. 정부가 플랫폼의 덩치를 강하게 규제하면서 점유율 규제와 인수합병 심사는 현행보다 까다로워질 상황이다. 같은 상황에서 SK와 CJ의 선택지는 경쟁사의 인수합병을 반대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생긴 숙제를 잘 풀어내는 게 중요하다. 우선 다시 ‘케이블의 미래’를 논의해야 한다는 점이 있다. 일단 CJ에게 남은 길은 콘텐츠-플랫폼 수직계열화를 강화하는 것이다. 알뜰폰을 가지고 ‘원 케이블’(One Cable) 대열에 합류하면서 케이블이 살아남을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이밖에도 CJ E&M에 넘겨버린 OTT(Over The Top) 서비스 티빙을 다시 가져오고, 망고도화도 진행해야 한다. 케이블 업계는 CJ와 티브로드는 중심으로 케이블 간 인수합병을 통해 생존방안을 찾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사업자 간 이해관계의 충돌과 그 결과로만 이번 일을 평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번 인수합병 과정에서는 미디어생태계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여러 층위에서 진행됐다. 언론·노동·시민운동 단위에서부터 학계까지 방송의 공공성과 지역성을 강화할 여러 아이디어도 나왔고, 방송통신융합 시대에 맞는 공공성은 무엇인지도 논의됐다. 미래부와 방통위가 과거에 비해 공공성, 지역성, 노동권, 시청권에 중점을 둔 심사주안점과 심사기준을 제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심사결과일 수 있고, 누군가는 승리했다고 자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언론, 운동단체, 학계, 사업자, 정부가 모두 공공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설령 어떤 사업자와 언론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외쳤더라도 말이다. 이후의 방송·통신 정책은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한다. 사업자들의 이해관계로만 인수합병과 규제완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공공성을 외친 자들이 지금부터 어떤 공공성을 실험하고 경쟁할지 지켜볼 때다. SBS를 비롯한 지상파방송사들이 기업의 갑질과 불공정행위에 대한 비판보도를 이어나갈지, KT와 LG유플러스가 어떻게 공공성을 구현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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