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밥’을 먹는다는 ‘속보’다. 밥 세끼 먹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인가 할 수 있겠지만, 밥을 같이 먹는 상대가 새누리당 소속 의원 전원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다. 흔히 있는 이벤트가 아니다. 특히 종종 정부 여당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 밥을 먹었던 전임 대통령들의 전례를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아왔던 박근혜 대통령이니 더 그렇다. 다음달에는 국회의장단 및 상임위원장단과 또 밥을 먹겠다고도 하는데, 본격적으로 당, 국회와의 소통에 나설 전망인 것 같다.

그동안 대통령을 ‘불통’이라고들 비난했으니 누구와 밥이라도 같이 먹는다고 하면 무조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왜 이렇게 못했는지를 정치적으로 따질 필요는 있다. 형식적인 3자회동, 5자회동으로 일관하다 이제야 이런 행보를 시작하는 이유는 대통령이 국회 내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단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4·13 총선의 슬픈(?) 결과는 순전히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한 탓이다. 이 ‘잘못된 정치’는 새누리당의 이후 상황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쫓겨난 유승민 의원의 복당 문제를 놓고 당이 두 갈래 세 갈래로 찢어진 거다. 그 정도 민심의 난타를 당했으면 친박이 고개를 숙여줄 만도 한데, 전국위를 무산시키면서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비박계가 반발하는 거야 그러려니 할 수 있으나, 친박이 와해되는 건 대통령 입장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 밖에는 잡을 줄이 없는 몇 명의 친박 강경파들 덕택에 친박의 당권장악 시나리오는 더 비관적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회장단과의 오찬에서 인사말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연합뉴스)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런 상황을 비난한다. 그런데 또 어떤 면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늘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심사보고서를 ‘드디어’ 발송했지만 IPTV와 케이블TV 특정 점유율 이상 권역에 대한 매각 조항이 인수합병 조건에 포함돼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의 심사보고서 내용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것 때문에 업계에서는 ‘불허 같은 인가’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말 그대로 공정하게 기관의 소신에 따라 조건을 부가하였다면 그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공정위의 판단과는 별개로 정권이 어떤 ‘그림’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방통위와 미래부의 판단이 남아있는 상태지만 인수합병이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이후 이른바 ‘방송산업’의 구도를 어떻게 가져갈지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정권 차원의 판단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에 떠도는 여러 ‘흉흉한 소문’을 고려하면 박근혜 정부가 그런 비전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신공항 문제가 대표적이다. 밀양이나 가덕도가 후보지가 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 김해공항 확장이 대안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은 반대로 밀양이나 가덕도가 대안이 아니기 때문에 김해공항을 확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됐든 공항 건설 역시 일정한 기준을 세워서 판단하고 추진하면 된다. 문제는 지방이 공항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조건을 돌파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무엇을 했느냐이다.

이를테면 이전 정부들은 나름의 지역발전 전략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이 행정수도를 이전한 것이나 이명박 정권이 수도권 규제완화에 ‘올인’할 수 있었던 건 이런 큰 그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박근혜 정권이 참여정부의 ‘지역균형발전’이나 이명박 정부의 ‘5+2 광역경제권’과 같은 전략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전략이 실제로 작동을 하든 안 하든 지방 입장에서는 뭐라도 기대할 거리가 있어야 공항을 포기하거나 사드와 같은 혐오시설을 끌어안든가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참 시끄러운 구조조정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는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무책임한 형태의 구조조정에 반대한다. 그런데 구조조정의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정권 차원의 구조조정에 대한 무슨 큰 그림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이른바 과잉중복투자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조선 해운업종 구조조정에 대한 진도가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건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한국형 양적완화’를 언급하면서부터다. 한국형 양적완화란 결국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국책은행을 지원해 구조조정 자금을 대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정부로부터의 독립적 의사결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국은행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4·13 총선 결과가 정부여당 입장에선 그야말로 ‘파국적’이었기 때문에, 한국형 양적완화는 선거 때의 그저 그런 공약(空約)이었던 걸로 유야무야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이후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구조조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이후의 상황은 마치 정부와 한국은행이 서로 핑퐁게임을 벌이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과 유사하게 흘러갔다. 정부는 기존의 입장에서 후퇴해 한국은행이 주장한 대로 직접적인 형태의 출자가 아니라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하는 데 합의했다. 이 직후 한국은행 금통위는 마치 정부의 ‘후퇴’에 화답하는 것처럼 전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그간 절대로 추경 편성은 없을 것처럼 하던 정부의 태도가 바뀐 것은 이 직후다.

상황이 오히려 구조조정을 핑계로 한 경기부양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경기부양이 필요한 구조조정이라면 그 대상은 조선 해운업종을 넘어설 것이다. 국회 탓, 정치 탓 하면서 날을 지새다 보면 금방 하반기는 지나갈 거고 2017년부터는 대선 국면이다. 구조조정을 한다는 바람만 잡다가 다음 정권이 책임을 뒤집어 쓸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것도 큰 그림이라면 큰 그림일까?

큰 그림이 허울뿐인 것도 문제지만 아무런 희망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 싸움만 붙이는 건 더 악질적인 행태다. 지방재정이 어려운 것 역시 하루 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법인세 인하로 전체 재정 규모 자체가 줄어든 판국에 보육예산 등을 지자체에 다 떠넘기기로 했으니 지방이 어렵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다들 어렵다고 하니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에 얹는 야바위를 시작한 게 지방재정개편안이다. 중앙정부는 돈이 없으니 지자체들끼리 잘 나눠 써보라는 취지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광화문 앞에서 단식농성까지 벌였던 것은 애초에 정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지자체들에 떠넘기고는 서로 싸움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인세를 인상해야 하지 않을까? 4일 대정부질의에서 법인세 인상의 필요성에 대한 지적이 나왔으나 정부 여당은 ‘세원은 넓게 세율은 낮게’를 들먹이며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증세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중앙일보의 조사에 의하면 당론과 관계없이 새누리당 소속 의원의 55%가 ‘점진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으나 어찌됐든 법인세 인상에 찬성한다. 증세의 당위는 인정할 수 있으나 결국 이 정권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인식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박근혜 정권의 통치가 ‘독재’가 아니라 ‘무책임’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무책임’이라는 비판을 비켜갈 수 있는 핑계를 이미 준비했다. 4·13 총선 직전까지 국회와 야당을 두고 ‘아무것도 못하게 한다’며 수차례 비난을 퍼부은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통치를 제대로 하려면 정치를 잘해야 한다. 결국 책임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한 대통령 본인이 지게 될 수밖에 없고, 이대로라면 박근혜 정권은 사실상 업적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런 식의 무책임한 정치세력에 다시 한 번 통치권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게 그나마 이 정권의 가장 긍정적인 측면이다. 이런 평가가 싫다면 욕하고 탓하다 말고 뒤늦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먹던 밥을 끊는 각오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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