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렸던 꽃망울이 기어이 참을 수 없는 설레임을 터뜨리고 바람은 벌써 한달음에 연두빛 포근함을 물씬 풍기고 있다. 바야흐로 야구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경기력의 WBC도 흥미로운 이벤트지만, 노골적이고 배타적인 KIA타이거즈 팬의 입장으로서 혹시 우리 ‘석민얼힌이’나 ‘용큐’가 너무 열심히 하다가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물론 무실점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석민얼힌이와 일본의 꽃미남에이스 다르빗슈(한국에 꽃범호가 있다면 일본엔 다르빗슈!)를 한 번의 안타와 도루로 침몰시킨 용큐의 활약에 흐뭇한 것은 사실이다. 몇몇 언론들에서 애국주의를 선동하지만 않는다면, 봉중근과 이치로의 대결 또한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야구감상을 방해하는 잡음에 잠시 눈살을 찌뿌려 보기도 한다. 프로야구의 시작이 그러했기 때문일까, 한국에서 야구를 단순한 공놀이로 바라보기는 정녕 어려운 것인지, 일본전 승리 후 마운드에 꽂힌 태극기를 보며 잠시 생각해본다.

▲ 한국일보 3월20일치 11면 기사
1라운드에서 일본에 콜드게임을 당한 경기를 제외한다면 매 경기 약간의 인간적인 실수를 포함하는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한국팀에 대해서 아니나 다를까 병역면제 이야기가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하일성 KBO 사무총장은 2회 연속 4강의 쾌거를 이룬 만큼 관계부처에 병역 혜택을 공식건의 하겠다고 밝혔다. 비단 WBC가 아니더라도 국제대회와 선수들의 병역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 야구국가대표팀 선발 당시의 잡음 또한 병역면제라는 당근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번 WBC 대회의 경우 2007년 말 병역법 시행령 개정으로 월드컵과 WBC에 대한 병역 혜택이 없어진 상황에서 대표팀이 소집되었지만, 기대이상의 호성적을 올리자 다시 병역면제에 대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병역 혹은 군대와 관련된 문제는 그 접근부터가 쉽지 않다. 이것은 비단 WBC 혹은 야구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포츠 스타를 비롯해서 합법적으로 군대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엘리트 집단과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멀쩡하게 군대 안 갈 수 있는 권력집단과 결국 가진 것 없어서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일반인들, 그리고 소수지만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수감되는 병역거부자들 등 다양한 집단의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입장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국방의 의무는 신성하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허구와 없는 놈들만 군대 간다는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그만큼 큰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은 모두가 군대가야 한다고들 하지만, 기실 군대 가야 하는 평범한 사람과 안 갈 수 있는 특권층과 가고 싶어도 못가는 비국민이 애초에 구분된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신화는 사실은 국방부와 병무청 그리고 사회의 지배층들에 의해 이미 누추해질 대로 누추해진 누더기에 불과하다. 이때의 국방의 의무라는 것은 군대에 가서 총을 들고 나라는 지키는 것,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의미의 군사안보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이미 병역법 시행령은 스포츠와 문화·예술 부문에서 각종 국제대회의 수상자에 대한 병역면제 혜택을 명시하고 있다.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는 이미 안보의 개념이 군사적 안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국방부와 병무청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군대 가서 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는 것은 모든 국민이 절대적으로 해야 할 만큼 신성하지도 않고, 군대가 아니라도 우리사회의 안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성한 국방이라는 신화의 해체와 안보 개념의 다변화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군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회 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이런 식의 병역면제는 결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국방의 의무가 신성시될 필요는 없지만, 이런 방식의 혜택은 국가가 마치 대단한 권한을 가지고 일부의 국민을 상대로 선심쓰는 것밖에 안 된다. 더더군다나 이 혜택은 소수의 엘리트들만 누릴 수밖에 없다. 운동선수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 문화예술계에서도 아주 소수. 대부분의 국민들과는 무관한 혜택이다. 유명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자제들이 부당하게 병역을 면제받았던 것과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일반인들은 누릴 수 없는 특권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유명 스포츠 선수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문화예술인이 아니더라도 모두 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직업이든 인간관계든 여러 면이 단절되는 것 아닌가. 누구의 시간과 재능만이 소중하고 다른 누구의 것은 소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군대가 아닌 다른 방식의 사회적인 복무가 보다 넓게 확대되어, 소수의 특권층이나 엘리트들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 혹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영역에서 사회적 성원으로서 공동체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군사 안보와 국가 안보의 지나친 중심성을 탈피하고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야구팬으로서 한참 때의 선수들이 군대에 가게 되는 것은 참 안타깝다. 어디 야구선수들 뿐일까. 조승우의 연기를 한동안 못보는 것도, 성시경의 노래를 한동안 못듣는 것도 안타깝다. 하지만 소수만을 위한 혜택으로 병역면제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군대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고, 총을 드는 일 말고도 자신이 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보다 살기좋은 세상일 것이다. 다시 야구 이야기로 끝을 맺자면, 남은 WBC에서 윤석민과 이용규가 맹활약하고 (부상은 당하지 말고) 그 기세로 곧 개막하는 2009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KIA가 작년보다 훨씬 월등한 성적을 거두기들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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