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부터 “유럽 고급지들이 선호하는 판형”이라며 베를리너판으로 신문을 찍기 시작한 중앙일보. 하지만 “고급 유력지들의 흐름”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비추어볼 때 ‘경찰의 아고라 네티즌 3명 압수수색’을 다룬 중앙일보 17일자 1면 톱 기사는 아무래도 격이 떨어져 보인다.

▲ 중앙일보 3월 17일자 1면
중앙일보는 17일 1면 톱 <아고라 3명 ‘인터넷 여론’ 조작>에서 “16일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서울 강남과 전남 순천 등에 사는 네티즌 3명의 컴퓨터 등을 압수수색했다. 이들은 아고라에 이명박 대통령을 비방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띄운 뒤 조회수가 많아지도록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다”며 “경찰은 조회 수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베스트 글’ 목록에 오르게 함으로써 네티즌들의 관심을 유발해 반정부 성향의 글이 확산되도록 여론을 만들었는지를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경찰은 지난해 9월쯤 일부 네티즌들이 아고라에 반정부 성향의 글을 올린 뒤 조회수를 조작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를 벌여왔다. 아고라 게시 글을 내사하는 과정에서 특정 IP 8개를 통해 조회수 조작이 이뤄졌다는 단서를 포착하고, 우선 4개의 IP에 대해 압수수색에 나섰다”며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선 한 네티즌의 글들은 아고라에서 최대 17만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압수수색을 통해 조작 혐의가 구체적으로 확인되면 해당 네티즌들에 대해 (다음에 대한) 업무방해죄 등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특정 시위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조회 수를 끌어 올렸는지 등에 대해서도 수사하겠다”는 사정 당국 관계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경찰발로 다뤄진 이 기사는 나름대로 ‘단독보도’다. 해당 기사가 나간 뒤 다른 언론들의 보도도 잇따르고 있으며, 이와 함께 경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다수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오마이뉴스는 17일 <아고라 조회 수 조작 누리꾼 단속 경찰,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나>에서 “(경찰은) 다음이 조회수 조작과 관련해 조사의뢰나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하겠다고 밝혔다”며 “조회수를 조작하면, 해당 아이디 정지 등 내부 절차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충분히 있다. 굳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이유가 없다”는 다음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17일 진보신당 게시판에 “경찰이 할 일 되게 없나 보다. 도대체 게시판 글에 클릭을 여러번 했다고 잡아가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라며 “작년에는 광우병 때문에 시끄럽더니, 올해는 광견병의 해가 되려나 보다”고 비판했다. 진보넷은 17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찰이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적극적으로 수사하는 것은 제 권한을 남용하는 것일 뿐더러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침해이다. 이것이 검열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통상 신문 1면 톱기사에는 가장 뉴스가치가 크고, 의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안이 배치된다. 17일자에는 신영철 대법관 조사 결과, 예멘 테러, 개성공단 억류 등 각종 중요 이슈가 산적한 날. 중앙일보는 이들 이슈보다 ‘조회수 조작한 네티즌 압수수색’ 소식이 뉴스 가치 면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음의 수사 요청도 없는 상황에서 인터넷 게시글의 조회수를 조작한 3명의 네티즌에게 ‘조회수 조작 첩보’ ‘반정부 여론 확산’ ‘시위 확산 목적’ 등의 과잉 수사를 사용해가며 ‘업무방해죄’ 혐의로 압수수색에 들어간 경찰이나 이를 1면 톱으로 주요하게 내보낸 중앙일보나 이해가 잘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동네에서 노는 천방지축 꼬마 아이들의 소식을 대서특필해서 전국으로 뿌린 것마냥, 보는 이가 오히려 겸연쩍고 부끄럽다. 경찰의 압수수색 대상이 3명이 아니라 3000명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가겠다.

정론지임을 자부하고, 고급유력지의 흐름을 따라 판형까지 바꿨다는 그들이 왜 정작 1면 톱기사로는 이처럼 격이 떨어지는 기사를 내보냈을까? 지난해 촛불정국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중앙일보는 정부 비판 성향의 네티즌들이 모이는 다음 아고라에 대해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중앙일보가 보도한 경찰 논리대로라면 이 신문도 압수수색이 필요하다. 네티즌들이 정부 비판 글의 조회수를 조작해서 여론을 조작하려 한 것과 중앙일보가 중요 이슈보다 뉴스 가치가 떨어지는 이 사안을 1면 톱으로 내보낸 것은 행위의 목적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7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신영철 대법관 조사 결과 대신 각각 1면 톱으로 개성공단기업협의회 문창섭 회장 인터뷰, 예멘 관광지 참사를 다뤘다. 그래도 중앙일보 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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