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청과 경찰이 용산사건 사망자 유족에 위로금 지급을 제안했다고 한다. <중앙일보>가 16일치 지면에서 단독으로 입수했다며 경찰 문건을 공개해 이같이 보도했다.

중앙의 이날 보도에 따르면 정부와 경찰이 사망자 5명 중 용산 재개발 4구역의 세입자인 양씨와 이씨 측에만 각각 1억5천만원, 7천만원의 위로금을 주기로 했고, 익명의 ‘유족 측’의 말을 인용해 “사과 표명과 함께 정식 절차를 밟으면 받아들이겠다”고 전하면서 “경찰과 구청, 재개발조합뿐 아니라 유족과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역시 협상에 응할 분위기가 성숙돼 가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 중앙일보 2009년 3월 16일치 기사

이에 용산참사 범대위는 이날 즉각 ‘경찰의 여론조작 앞잡이로 나선 중앙일보’라며 논평을 내어 “중앙의 보도는 유족 일부 차등 지급 등 ‘전형적인 내부 편가르기’와 익명 취재원만 등장하는 ‘풍문’ 기사”라고 맹비난했다. 범대위는 “유족들은 물론 범대위도 보상이나 위로금과 관련해 어떠한 제안을 받은 바가 없다”면서 “설혹 그런 제안이 온다고 해도 거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유족들은 보상 및 장례절차와 관련된 일체의 사항을 범대위에 위임한 상태다.

또 범대위는 “고인과 철거민들을 살인자로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보상과 장례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 유족과 범대위의 한결같은 원칙이다. 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용산4지구의 철거공사가 강행되고 있다.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철거공사 강행은 유족들을 우롱하는 행위다”며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느 누가 보상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용산 참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일부 위로금을 지급해 마무리 지으려는 경찰 및 용산구청 쪽과, 이에 맞서 고인과 철거민들을 살인자로 만들어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킨 상태로는 보상과 장례 절차를 진행할 수 없다는 용산 참사 범대위의 입장, 어딘가 익숙한 구도 아닌가.

지난달 말 3·1절을 앞두고 일본군 종군위안부 출신 송신도 할머니가 10년간 일본정부에 대해 공식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 과정을 그린 다큐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개봉됐다.

알려진 대로 일본정부는 정부의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국가 배상’이 아니라 ‘민간 위로금’을 내세웠다. 1995년 일본 정부는 ‘민간모금을 통한 개인적 보상(위로금 지급)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뒤, 재단법인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에 종군위안부 생존자들과 지원단체들은 일본 정부가 국가폭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민간부문의 선행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무책임하고 편법적인 태도라고 반발하며 위로금을 거부하고, 공식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앙일보는 지난 1월 8일치 인터넷판 기사 ‘일본 사죄만 받으면 눈 감아도 여한 없어…위안부 길 할머니의 하루’에서 일본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해 온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수요집회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해당 기사에서 중앙은 일본 정부가 ‘사죄’ 대신 내놓은 ‘위로금 지급’이라는 편법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사죄만 받으면 눈 감아도 여한 없다’고만 할 뿐.

한국 언론 다수는 그동안 끊임없이 일본의 종군위안부 배상 회피와 위로금 문제를 지적해왔다. <경향신문>은 2007년 3월 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위안부 동원에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나 뒷받침하는 것은 없었다”는 망언에 대해 “일본 정부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과 같은 꼼수를 부리지 말고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하라”고 촉구했다.(2007년 3월 5일자 사설 ‘또 시작된 일본의 위안부 역사왜곡’)

또 세계일보는 지난 99년 8월 유엔의 일본국 위안부 관련 결의안 채택에 대해 “일본정부의 무한책임을 선언했다”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책임회피와 국가적 이기주의로 일관해 왔다. 그들은 ‘배상’이라는 표현 조차 수용하기를 거부했으며 자기네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억지를 펴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기금’이라는 민간차원의 기구를 만들어 알량한 ‘위로금’을 주겠다고 나섰다”고 비난한 바 있다.(1999년 8월 30일치 사설 ‘유엔이 나선 위안부 ‘한풀기’’)

한국일보의 경우 지난 98년 8월 13일 유엔 인권소위에 제출된 ‘맥두걸 보고서’의 일본정부의 위안부 관련 법적책임을 명확히 하고 유엔에 국제기구차원의 대응을 권고했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일본정부는 보고서의 지적대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범죄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관계자 처벌 및 국가배상을 서둘러야 한다”며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아시아여성을 위한 평화기금’의 구호활동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1998년 8월 15일치 사설 ‘‘위안부’에 관한 유엔보고서(社說)’)

그러니까 문제는 ‘위로금’이 아니라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사죄’와 ‘배상’이라는 얘기다.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한다면 책임에 걸맞게 배상을 할 일이지 위로금으로 위로할 일은 더욱 아니다. 이러한 태도가 일본 정부이든 한국 정부이든 간에, 국가폭력을 바라보는 언론사가 가져야 할 입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 그러나 최근 몇년 간 중앙일보 기사를 검색해봐도 일본군의 위안부 사죄 및 배상 책임을 비껴가는 민간 위로금과 관련한 보도는 찾기 어렵다. 중앙일보의 오늘(16일치) 용산 유족 보도에서 경찰의 위로금만 등장한 것도 우연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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