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뉴스9>에서 고 장자연씨가 숨지기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건’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술접대·성상납 요구, 폭행 등 연예비리에 대한 내용과 함께 신문사 고위 인사, 방송사 PD, 제작사 대표, 기업체 간부 등의 실명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9>는 문건을 공개하기 앞서 “KBS는 숨진 장씨의 명예와 불법행위 사이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문건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과연 이것이 진정 언론의 역할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초 측근이 공개한 유서에는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가슴 절절한 글귀다. 그 문구 자체에 ‘권력구도 안에 있는 장자연이라는 신인 여배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통 역시 고스란히 전해진다. ‘배우’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온전히 그렇게만 살지 못하도록 하는 연예시스템 속에서의 ‘여’배우. 그것이 신인배우 장자연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 3월 16일자 동아일보 12면 기사
장자연씨의 문건에 대해 수사가 진행되고 있고 실명 거론된 인사들이 누구인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문건내용이 사실로 밝혀지면 그 경중에 따라 거론된 인사들은 처벌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만 가더라도 기대 이상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중보다 먼저 언론에 의해서 빠르게 잊혀질 것이다. 더는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흥미거리’가 없을 것이므로.

그러나 제2, 제3의 장자연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그리고 제2, 제3의 장자연은 기획사에 소속된 여성 연예인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장자연씨 사건은 연예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 두 건의 비연예계 사건들이 있다.

얼마 전 박범훈 중앙대학교 총장이 한나라당 의원모임 초청 강연회에서 소리꾼으로 출연한 제자를 가리켜 “이렇게 생긴 토종이 애도 잘 낳고 살림도 잘한다. 요렇게 조그만 게 감칠맛 난다”라는 성희롱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그 제자는 여성이었다.

▲ 2월 26일자 한겨레 10면 기사
‘소리꾼’으로 그 자리에 참석해 열창을 보여준 제자였으나 소리꾼으로서의 평가가 아닌 ‘애도 잘 낳고 살림도 잘하는 토종 여성’으로 평가절하된 것이다. 누구의 시선으로? 자신의 스승인 박범훈 총장에 의해서. 이에 같은 학교 진중권 겸임교수는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통해 “도대체 자기 제자를 정치인들 모인 곳에 불러다가 소리 시켜놓고서, 공부하는 학생을 조선시대 관기 취급하듯 하는 게 스승으로서 할 짓인지…”라고 비판의 글을 올렸다.

박범훈 총장은 자신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사과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과의 글에는 “그 자리에는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도 있었고 다른 여성들도 많았지만, 오히려 강연이 끝나고 박수까지 받았다”, “나는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절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 아니었다”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사과가 아닌 해명이라는 또다른 비판을 받기도 했다.

좀 더 거슬러 가보면 생각나는 인물이 또 있다. 언론에 의해 세기의 스캔들이 되어버린 신정아씨가 그러하다. <시사IN>의 “스님과 언론의 신정아 벗기기”기사를 보면 ‘신정아’라는 한 큐레이터가 ‘여성’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수모가 잘 나타나 있다.

▲ '시사IN' 3호에서 보도한 신정아의 기자관리법 기사ⓒ시사인
“신씨는 기자들을 관리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 금호미술관에 근무할 때 신씨는 지방 출신 기자들의 귀성 비행기표를 마련해주곤 했다. … 추석 때마다 신씨 어머니는 고향인 경북 청송에서 사과 40상자를 기자들 몫으로 올려 보냈다. 주부 기자들에게는 참기름과 고사리 등 맞춤선물을 따로 챙겼다.”

“신씨는 기자들이 치근덕대는 바람에 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기자간담회가 끝나면 남자 기자들이랑 가라오케에 가는데, 블루스를 추자고 해놓고 더듬는 기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울고불고 했다. 나중에는 대처하는 법이 생겨 ‘내가 얼마나 비싼 몸인 줄 아느냐’며 피해갔다.’”

큐레이터로서 기자간담회에 참석했고, 친분 유지를 위해 가라오케에 간 신정아씨는 진중권 교수의 말대로 ‘관기’ 취급 당한 것이다. 누구의 시선으로? 남자 기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신인 여배우 장자연씨는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소리’를 하는 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큐레이터’였다. 하는 일이 다를 뿐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 한국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학력을 속였느냐 속이지 않았느냐 같은 신정아씨의 개인 도덕성 문제가 이들 여성이 남성 지배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공통된 모순에서 신씨를 배제시킬 수는 없다.)

<노컷뉴스>에서 한 방송사 간부 PD가 이런 말을 남겼다. “배우와 술을 마실 수는 있다. 그러나 함께 술을 마신 것을 두고 배우가 강요에 의해 술을 접대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도대체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한 ‘배우’로서 그 자리에 있었느냐 혹은 ‘접대’를 위한 ‘여성’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느냐가 될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장자연씨는 감독이 골프 치러 갈 때 술과 골프 접대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룸살롱에서도 술 접대를 강요받았다고 했고, 원치 않는 잠자리까지 강요받았다. 이것이 정상적인 배역 캐스팅을 위한 ‘배우 대 감독’, 광고 출연을 위한 ‘배우 대 기업간부’, 취재를 위한 ‘배우 대 언론 관계자’의 만남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나.

그러나 재밌는 사실이 있다. 최근에 장자연의 죽음을 두고 나오는 보도를 보면, 매니저, 방송사PD들은 ‘요즘 세상에’라며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여배우들의 인터뷰 내용은 180도 다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꼴이다.

몇 해 전 큰 인기를 모은 KBS 드라마 <황진이>에 백무가 “재주를 파는 것이 예기(藝妓)이거늘, 웃음을 파는 창기가 되려 하느냐”라고 매향에게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어쩌면 위 세 사람은 재주를 팔고자 했으나 웃음까지 팔라고 강요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예인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 장자연의 죽음이 진정 슬픈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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