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희한한 시장이 하나 있다. 상품을 구입하려는 사람은 많다. 팔려는 상품도 엄청나다. 그러면 적당한 선에서 상품 가격이 결정돼야 한다. 소비자 만족도도 극대화돼야 한다. 그런데 이 시장에서는 상품의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소비자도 늘 불만이다. 무엇보다도 상품의 수요와 공급을 독점한 업체들이 따로 있다. 그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그 둘은 언제나 짬짜미를 한다.

이쯤 되면 일종의 시장 실패(market failure)다. 정부가 개입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가 나서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다. 심지어 국민이 죽어나가는 데도 나 몰라라 한다. 이쯤 되면 그 시장이 어딘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연예 시장이다. 정부가 나서지 않는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수요와 공급을 대행하는 업체들이 무척 힘이 세다. 연예인을 필요로 하는 곳은 대부분 방송사다. 연예인을 공급하는 곳들은 연예 기획사다.

▲ 경향신문 3월14일자 8면

방송 소비자의 원성을 사면서도 끄떡없는 방송사의 힘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일단 선정적인 내용으로 시청자의 이목을 끌면 그만이다. 광고를 유치하고 방송사의 입지를 굳히는 일 외에는 관심도 없다. 팔고 나면 애프터서비스야 신경도 안 쓰는 기업과 다를 바 없다. 초등학생이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이 연예인인 나라에서 기획사의 힘은 또 어떤가? 어디서든 뽑아서 키워줄 수 있는 한 그들은 키다리 아저씨가 돼주기도 한다. 뜨기 전이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그들은 저승사자 역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연예 기획사가 연예인 지망생과 맺는 계약서가 일종의 노예 계약으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다. 심지어 돈을 요구하는 기획사들도 있다. 연예 기획사들은 이를 자신들의 초기 투자에 대한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조금만 뜨면 기획사를 옮기는 배은망덕에 대한 예방 조치라고도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구조는 사회 정의 측면에서도 명백한 문제가 있다. 노예 계약의 당사자인 연예인들이 잇달아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이런 스타 시스템의 내밀한 부분을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연예 기획사로 몰리고 있다. 우리 주변 아이들이 죽음을 향한 질주로 몰리는 격이다.

연예 기획사들, 이제 그런 일은 없노라고 너스레 떨지 말자. 단순한 헛소문이라고 우기지도 말자. 연예인 자신들이 잇달아 한 고백이 있다.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간접 증언도 있다. 이번에 대한민국을 뒤흔든 한 연예인의 죽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실체가 확인되기 전이라고 연예계의 문제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연예인 지망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주변의 경험담들이 넘쳐난다.

방송사와 연예인 기획사 사이의 담합에서 가장 큰 불법과 편법이 발생한다.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터지는 방송사 PD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다. 단순히 술을 사주고 돈이나 주식을 주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연예인 성 접대설도 툭하면 터져 나온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황 증거는 가능성이 높다는 쪽을 가리킨다. 이 담합에는 간혹 기업 광고주와 정치인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도 간여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연예계에서 스폰서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이는 게 그 근거다.

이 담합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예 외면해버리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산업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연예 시장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며, 연예인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예인들은 엄연히 인격이 있는 청소년이나 성인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상품처럼 소비하는 방송국과 연예 기획사,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의 아들, 딸, 동생들이다. 아무렇게나 소비당한 그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일만은 아니다. 더욱이 인격 모욕적이지만 화려한 그들의 삶을 우리 청소년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마당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부가 개입해야 할 부분은 두 가지다. 우선은 연예 기획사와 매니저를 좀 더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 요건을 강화하고 활동을 감독해야 한다. 이 분야에 여전히 조폭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는가? 연예 기획사와 연예인의 관계도 재규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노예 계약 관계는 세계 각국의 스타 시스템 가운데서도 가장 기형적이고 불공정하다. 연예인 지망생이 뜨기까지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고, 뜨고 나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계약이다.

두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일본 모델이다. 일본의 경우는 연예인이 대형 연예계약사에 속한 직장인과 같은 존재가 된다. 월급을 조금 많이 받는 직장인에 불과하다. 대신 연예인으로 뜨기까지는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고, 연예인이 되고 나서는 더 안정적이다. 그러나 이런 완전한 전속 모델은 현재 우리 연예 산업 구조상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대신 구미의 에이전시(agency) 시스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연예 기획사와 연예인은 서로 일을 찾아주고 수입을 나눠준다. 대신 연예 기획사들이 연예인을 완전히 육성시켜주는 일도 없다. 메이크업과 코디네이터, 그리고 차량과 기사 비용까지 지불해주는 일도 없다. 연예인에 따라 다른 것은 수입 분배 비중 정도다. 현재의 전속 시스템을 어떻게 에이전시로 바꿀까?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정부 부처가 표준 계약서를 제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게임의 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시장이 실패한 여러 분야에서 실제로 우리 정부는 줄곧 이런 방법을 써왔다.

이런 제언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예 산업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굳어진 문화나 관행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현재의 연예 산업 구조는 많은 기득권층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 경영진과 PD들, 그리고 연예 기획사. 그들의 뒤를 봐주는 기업가와 정치인 등까지. 많은 국민들이 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길 원한다. 그러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굿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한 우리의 아들과 딸, 동생 들인 연예인 지망생들의 불행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와 헤럴드 미디어에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 전문 기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독립해 프리랜스 기자로 활동 중이다.
라디오와 각종 매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세상 모든 삶의 방식과 유행을 전하고 있다.
시대상과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라이프스타일 분석이 주 관심사로,
블로그를 ‘1인 언론’이라고 부르는 파워 블로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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