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낮에 동네를 걷다가 우연히 한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 출입문 바로 옆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고등학생 이하 출입금지」 뭐냐, 저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카페가 자리 잡은 대로변 건너편에는 마침 하교한 초등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저 사람들이 이 안내문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 이 사회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인간 취급을 받는 암묵적인 선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고등학생 정도면 뭐 조용하니까 인정. 하지만 중딩 이하로는 너무 시끄럽고 산만해. 더 어린애들은 말할 것도 없지.’ 사람 품평하는 냉정한 목소리가 저 카페가 내건 안내문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날 이후로 특정 대상에게 당당히 ‘출입 금지’를 외치는 공간들을 눈 여겨 보게 되었다. 내가 본 카페처럼 청소년의 출입을 대놓고 거절하는 공간은 흔치 않다. 이보다 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노키즈존(No Kids Zone. 카페, 음식점 등의 장소에서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 주로 5세 이하 미취학 아동의 출입을 금하는 편)’이다. ‘노키즈존’을 선택한 매장들의 주장은 대부분 다음과 같다. 아이들이 들어올 경우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는 경우가 많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피해가 발생해 부득이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밥 먹은 테이블에 아기 똥 기저귀를 버리고 가고, 떠드는 아이들에 대한 주의를 부탁하면 되려 역정을 내는 일부 엄마들의 사례가 SNS를 통해 퍼지면서 노키즈존 매장들은 피해 업소의 이미지를 획득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불쌍한 사장님과 알바생의 끝이 없는 고생담은 그악스러운 맘충(엄마를 뜻하는 mom과 벌레 충蟲의 합성어. 제 아이만 싸고도는 일부 몰상식한 엄마에 대한 혐오 표현)의 진상 짓과 대비되며 도덕적인 정당성까지 획득했다.

노키즈존을 둘러싸고 ‘애들이 무슨 죄냐’는 식의 우려 섞인, 모기 소리만큼 조그만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일방적 출입금지를 당한 아동들의 처지에 관심이 없다. 시끄럽게 울고 떠드는 애들 때문에 눈살 찌푸려가며 밥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당장의 편리함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나 책언니 덕분에 어린 사람들의 편에서 생각해볼 일이 많았던 나로서는 인터넷 상에 떠도는 맘충 괴담보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출입금지 시켜도 좋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배타성이 더 무섭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상적인 공간에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들어갈 수조차 없게 하는 극단적인 ‘금지’가 이렇게 손쉬워도 되는 건가.

아이들한테 뛰지 말라고 하는 건

만약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노키즈존 찬성론자들이라면, 책언니 활동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강화도 책언니 수업은 00 도서관 안에서의 작은 방 안에서 이뤄진다. 시종일관 서로 치대고 노느라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 한 명이 때리고 도망가면 다른 애가 괴성을 지르면서 쫓아가는 소리, 여자애들이 너네 조용히 좀 하라고 빽! 내지르는 소리 등으로 잠잠할 틈이 없다. 창가에서 오두방정을 떨다가 잘 달려있던 커튼 봉을 떨어뜨린다던가 하는 사소한 기물 파손 역시 가끔씩 벌어진다. 흔히들 도서관에서 하면 안 된다고 하는 3종 세트를 다 한다. 떠들기, 뛰기, 싸우기. 너무 심하다 싶을 때는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얘들아, 얘들아, 그만 좀’ 하고 따라다니며 말릴 때도 있지만, 보통은 알아서 수그러들 때까지 내버려둔다.

그림책 ‘블룸카의 일기’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하는 건 심장한테 뛰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야.”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교육자 야누쉬 코르착은 ‘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어떤 존중을 받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실제로 코르착은 아동인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고 들었다. 뛰고, 까불고, 놀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장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시끄럽게 떠들고 요란스럽게 뛰어다닐 권리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몸 안에 팔딱팔딱 에너지가 넘쳐난다. 이걸 무시하고 책상 의자에 눌러 앉혀 놓는다고, 조용히 하라고 윽박을 지른다고 아이들의 몸이 어른들이 원하는 얌전한 몸으로 개조(?)되는 건 아니다. 어린 사람들을 정말로 존중하고 싶다면, 이들의 에너지도 같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보통의 어린이 도서관, 다른 공간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책언니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4년째 이 공간에서 안정적으로 책언니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서관 관장님도, 사서 언니도 어린 사람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해주시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 도서관 내부의 가구들은 애초에 튼튼한 재질로 만들고, ‘도서관에서는 뛰지 말자’ 같은 고정된 규칙을 만드는 대신, 가능한 때는 자유롭게 놀고 조절이 필요할 때는 조심하자고 얘기하는 등 유연하게 공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관장님이 워낙에 이 도서관을 애들이 오며가며 편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만드셨다고 들었다. 그 마음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도서관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커다랗고 하얀 곰인형의 존재에서, 앞마당에 설치된 4인용 그네에서 느껴진다. 우리도 애들이랑 곰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아무 그림책이나 읽고, 그네에 늘어져라 기댄 채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 한 뼘씩 더 친해졌다.

정말로 필요한 건, 이것이다. 어린 사람들은 노키즈존이 아니라도, 이미 갈 곳이 없다. 자기 밖에 모르는 어른들이 아이들이 있을 곳을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들이 노키즈존을 따위를 만들 시간에 아이들이 정말로 맘 편히 놀 수 있는 공간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을 위한 공간은 거리에 널리고 널렸다. 무수한 식당, 카페, 술집, 유흥시설…. 같은 땅 위에 어린 아이들이 갈만한 공간은 없다. 손에 꼽을 수 있다. 놀이공원이나 워터 파크 같은 크고 비싼 일 년에 한 두 번 가는 놀이 시설, 극소수 있는 키즈 카페, 재미없는 박물관 등. 비루한 놀이터 말고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갈만한 공간이란 게 대체 어디 있나. 이 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 위에 세운 무수한 건물들이 죄다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데, 그중 일부도 어린이들에게 내주기 싫다고 노키즈존 따위에 반색하는 이기적인 어른들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흥칫뿡이다!

그들이 세운 문턱 앞에서 내쳐지는 것은 누구인가

물론 현실은 조금 더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가게들에서 노키즈존을 택하게 되기까지는 다른 손님들의 기피로 인한 매상의 타격이든, 아이를 데려온 일부 손님들이 보여주는 행태로 인한 피해든, 가볍게 취급할 수만은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이다. 커뮤니티에 떠도는 알바생들의 ‘썰’을 보면 세상에 저런 손님들도 있다는 사실에 입이 안 다물어지기도 하고, 힘들게 일 하는 입장에서 어떤 복병을 안고 올지 모르는 어린 손님의 존재를 자체를 기피하게 될 수도 있었겠다고, 그 심정만큼은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고생담은 아동의 출입금지라는 차별적 배제를 진상 손님들의 횡포를 막기 위한 합리적인 대응으로써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죄송하지만 공감과 지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잘못된 대상을 향한 위험한 하소연이다.

우리가 ‘노키즈존’에 관해 짚고 넘어가야할 아주 단순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하나, ‘맘충’ 에 관한 자극적인 일화는 극히 일부 손님들의 사례다. 소수의 잘못을 같은 엄마라는 이유로 나머지 모든 엄마들에게 연대책임이라도 물을 셈인가. 둘, 가게에서 진상 부리는 손님이 어디 아이 가진 여성들뿐일까? 고객은 왕이어서는 안 된다. 일 하는 사람을 노예 부리듯 하는 서비스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1차적인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출입금지 시켜버리고 싶은 또 다른 ‘충’들은 언제고 나타날 것이다. 진상 떠는 아저씨 손님, 대학생 손님에 비해서 실제로 엄마라는 집단이 더 두드러지게 경향이 있다고 해도, 사회 전반적으로 공공장소에 육아에 관련한 시설이 미비하다는 점, 이로 인해 육아를 하는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수십 가지 고충들도 함께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이라면 물론 조심해야 하고, 소위 말하는 공공장소의 에티켓도 지켜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고 개개인의 몰지각 탓으로만 모든 원인을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마지막으로, 아동이 힘없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그렇게 쉽게 고작 A4용지에 적힌 한 줄짜리 안내문 따위로 문 밖에 내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동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자라(zara) 매장 앞에서 출입을 금지당한 어느 여성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장 안에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급발진의 위험이 있어서 출입을 막기로 했다는 것이 해당 매당 측의 설명이었다. 그들이 세운 문턱 앞에서 이토록 손쉽게 바깥으로 내쳐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봐야 한다. 일방적으로 세운 그 문턱의 폭력성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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