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 한 사람에 의해 농락당하는 한국의 사법부. 한국의 판사들이 얼마나 허약체질인지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정작 대법관 한 사람에 의한 사법부의 농단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사법부를 농단하는 대법관 한 사람을 그 많은 판사들이 한 마디도 못하고 ‘참아냈다’는 점이 우려스런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든 메일을 받았든 아니면 직접 대면했든, 신영철 대법관과 접촉했던 판사들이 수 십명에 이르고 있다. 한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 신영철 대법관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사법부의 핵심간부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판사들은 신영철 법관 앞에서 굴종했고, 비굴하게 생존하는데 급급했던 것.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슬쩍 언론에 흘려 사회적 문제로 비화시킨 후, 익명으로 자신들의 ‘불쾌감’을 대법관에게 전했다.

▲ 한겨레신문 3월13일자 1면

한국의 사법부는 그 조직 안에서, 이미 표현의 자유는 거세시킨 채 운영되고 있음을 이번 기회에 국민들은 충분히 목격하고 있다. 판사. 정치판에서 지들끼리 싸우다 안되면, 표현의 자유도 없는 그런 하잖은 판사, 그런 비굴함이 체화되어 있는 판사들에게 심판을 구한다. 웃긴 나라가 된 것. 하지만 웃을 수 없는 슬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 표현의 자유는 다시 한국사회에서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미디어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핵심가치다. 항상 그렇듯이 본말은 권력에 의해서 전도된다. 이명박 정부를 배후로 삼고 있는, 대법관 한 사람의 사법부 농단을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사회가 아니라, 대법관의 사법부 농단을 고발하고 비판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

이것이 지금 한국사회다. 왜 고발한 자, 비판한 자를 보호할 수 없는가? 고발해야 할 사람,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왜 비굴해져야 하고, 굴종적 삶의 태도를 속으로만 아파하면서 겉으로 표현할 수 없게 되었는가?

이는 바로 언론이 상식과 합리로 세상을 보지 않고, 오로지 정치권력집단의 심기만 고려한 보도를 일삼고 있는 데서,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비중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데, 이미 조중동과 같은 신문시장의 지배적 언론이 특정정파와 짜고, 항상 그 반대를 향해 비수를 들이대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몰상식해도 몰이성적이어도 몰합리적이어도, 그들은 뻔뻔스럽게 정파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실도 본질도 상식도 왜곡해 왔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영철 대법관 한 사람에 의한 사법부 농단이 사법부의 위신 추락에 일차적인 원인인지, 아니면 대법관의 사법부 농단을 덮어두지 않고 고발하고 비판한 사람들 때문에 사법부의 위신이 추락한 것인지, 그 관점은 항상 다르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보기에 어떤 정권 하에서 유사한 일이 발생했는지가 판단의 일차적 기준이지, 사건 자체의 본질에서 판단의 기준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나라당 정권, 이명박 정부에 유리한 관점이 필요할 뿐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문제를 비판한 고발자를 향해 사법부의 이미지를 훼손시킨 행위로 매도하는 것이 이들의 관점이다. 노무현 정부였더라면, 대법관이 사법부를 농단한 행동, 판사들의 독립적인 판결을 방행한 행동을 부각시켜, 정권의 공격용으로 사용했을 터.

삶 속에서 뿌리내려야 할 표현의 자유가, 조중동 따위의 언론사들 때문에 왜곡되고 폄훼될 수 있기 때문에, 속으로 분노하고, 그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면, 언론에 슬쩍 흘리고,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하면, 아주 어렵게 용기를 내어 발언, 그것도 익명으로 발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판사집단마저도 굴종의 삶 비겁한 삶을 살게 강요하는 원인이 바로, 조중동과 같은 야비한 언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구성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삶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언론, 공정한 언론,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는 언론이, 언론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법제화하는 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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