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앞에 놓인 갱지 한 묶음. 여느 때처럼 숫자로 가득한 누런 보도자료는, 봄바람으로 반쯤 감긴 눈꺼풀을 더욱 처지게 만든다. 달콤한 졸음을 걷어찬 건 따따부따 강한 어조의 영국식 정통 영어 발음이었다. 점심시간 이후 옆방에 불현듯 나타난 어느 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소유한 여자는 뭐라고 막 시끄럽게 떠들더니 잠시 후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영국인이 다녀간 한국은행 공보실은 다시 웅성거렸다. 경제정책과 관련, 외신에 한국이 ‘국수주의’ 국가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4년 전 쯤의 일이다. 당시 한국 특파원으로 새로 왔다는 어느 파이낸셜타임스(FT) 여기자의 연이은 원색적 비난 보도는 간접 당사자인 한국은행을 넘어 직접 당사자인 금융감독위원회(지금의 금융위원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FT는 금융당국의 증권 및 은행 감독 분야 강화 움직임에 대해 ‘정신분열증’이라고 묘사했다. ‘지분 5%룰(rule)’과 ‘시중은행 외국인 이사수 제한’ 등이 주된 찬거리이었고, 영국계 펀드와 은행은 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후 파악 없이 대충 읽으면 그 신문 지면상의 한국은 빗장만 꽉꽉 걸어 잠그는 ‘쇄국랜드’였던 것이다.

봄바람은 더욱 잔인하게 따스해졌지만 한국이 당하는데(?) 졸고만 있을 수 없었나 보다. 부랴부랴 금융감독위원장을 찾아갔고 다음 인터뷰 기사를 냈다. 금감위원장의 말을 인용 보도한 기사의 요지는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맹목적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 한국 기자로서 ‘설욕’ 했다고 당시 생각했으나 지금 돌아보면 다분히 ‘감정’ 섞인 시각으로만 접근했던 것 같아 못내 아쉽고 부끄럽다.

그 영국 기자도 그랬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자기네 고향 펀드 ‘헤르메스’를 징계한다고 난리니 서방 유력 경제일간지의 힘을 과시하고 싶지 않았을까.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은 내팽겨친 채…. 인터뷰 기사가 ‘영문’이라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열받은 걸까, 그 이후 그 기자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한국 정부의 정책들을 비난했다. 나중에 금감위에 항의도 심하게 했다고 한다. 왜 자신의 취재엔 위원장이 응하지 않느냐며. 그러나 감독당국을 잠시나마 뒤흔들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던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5%룰’과 ‘외국인 이사수 제한’이 이미 여러 선진국에선 가동 중이었고 투기자본의 폐해 등으로 한국은 뒤늦게나마,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제도를 정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비판 보도가 나온 것이니 이해해줄 만도 하다. 한편, FT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정부의 정책 방향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되레 우호적이었다.

▲ 3월13일치 중앙일보 3면 기사.
정권이 바뀐 지금 또다시 외신 보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다른 FT 기자가 바통을 넘겨받은 상황. 여지없이 비판적 기사를 쏟아낸다. 그러나 달라진 게 있다. 2005년도엔 FT만 유독 그랬던 반면 지금은 월스트리트저널과 이코노미스트 등 다른 외신들도 가세했다는 것.

정부가 경제 위기상황을 덮어 가리기에만 급급하다고 한다. 제발 4년 전처럼 이들의 보도가‘단순 의도적’이거나 ‘딴지걸기’로 판명되면 좋겠다. 근데 현 정부의 말보다 외신 보도를 더 신뢰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여론조사는 뭘 말하는가. ‘위기설’의 원인 제공을 누가 봐도 정부가 했다는 얘기 아닌가.

원-달러 적정 환율이 1300원이라면서 고환율 정책 쓰다 최근 물러난 분이 누군가. ‘미네르바’ 탓에 이어 정부는 이제 외신 탓을 하면서 시시각각 대응하겠다고 한다. 말 그대로 외신이 ‘신’인가. ‘붕괴 직전의 외환위기다’라고 외신이 보도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가 말이다.

외신이 좀 과장 섞어 지적하더라도, 정책의 문제가 뭔지 차분히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한 게 아닐까. 조금 자극한다고 ‘눈에는 눈’의 태세로 대응해봤자 1500원 넘나드는 환율이 900원대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되돌릴 의지나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신보도에 일희일비하기보단, 법과 제도를 탄탄히 정비하고 건실한 정책을 펼치는 것이 근본 해결책일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서방언론의 ‘자의성’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적 수용을 한다. 만약 악의성이 포함되어 있다면 금방 알아채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내 언론의 외신 인용보도는 어떤가. 우리가 먼저 보도한 사안임을 망각하고 외신이 한 달 후 쯤 앵글로색슨의 시각으로 포장해서 보도하면, 부화뇌동으로 그 뒤를 또 쫓아가는 식의 ‘부메랑 보도’에 자주 가담하는 매체가 종종 보인다. 그러니 서방 언론사들은 계속 신날 수밖에. 국내 언론과 정부가 같이 말려들고 만다.

외국인 기자가 한국에 신참 특파원 자격으로 들어오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비판적 기사만 내보내는 경향이 있단다. 맞는 얘기라면 져주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우리 정부가 귀엽게 봐 주는 것도 미덕 아닌가. 무반응이 더 약 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2005년 당시에 알량한(?) 대한민국 기자 자존심으로 FT에 맞서지 말았어야 했다. 허점을 보여서 글로벌자본의 놀이터를 만든 정부의 잘못이라면 잘못이고 망신이지 외신이 죄인이라고 볼 순 없기 때문이다.

그 FT 여기자와는 2007년이 되어서야 한미FTA 협상장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본국에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의 경제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자신의 뒤를 이은 서울특파원 신참한텐 한국 흔들기 코치 잘 해주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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