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해보자. 말을 죽어라고 안 듣는 꼬맹이가 있다. 단, 머리는 좋다. 아니,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닌 아이다. 이 아이가 몹시 하고 싶은 어떤 일을 하려다가 선생님의 제지로 못하게 됐다. 그리하여 제 분을 참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선생님에게 해서는 안 되는 어떤 제스처를 했다고 치자. 화들짝 놀란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회의를 했다. ‘이 아이를 어쩔 것인가?’ 그러곤, 이런 결정을 내렸다. 6일간 유치원에 오지 말 것, 6일치의 등록비를 더 낼 것. 그리고 매일 아침 유치원 앞에서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쓰여 진 피켓을 들고 얌전하게 서 있을 것.

어떤가, 당신은 납득할 수 있겠나? 난 못하겠다.

▲ 3월 11일자 한국일보 34면 기사. 한국일보는 스포츠팀장의 편집국 칼럼을 통해 이천수에게 무한 도덕에 가까운 책임을 요구했다.
평소, 그 아이의 성향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 벌을 주려면 행위 자체를 객관화해야 한다. 그리고 과연, 할 수 있는 행위였는지, 아니었는지 최대한 공정하게 가늠해야 한다. 잘못된 행위가 분명하다면 물론, 자신이 한 행위에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단, 모든 것은 교육의 일환이어야 하고 어디까지나 책임에 상응하는 정도의 공정함이어야 한다. 그러한 전제와 과정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건 벌을 가장한 분풀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누구냐고? 바로 축구선수 이천수이다.

아귀가 맞지 않는 비유라고? 조건반사적으로 귀여움이 연상되는 아이의 예는 가치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이천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단지 몹쓸 악동일 뿐이라고? 좋다. 예를 다르게 들어보자.

박지성이 시합 중이다. 맨유가 0 대 5로 지고 있다. 박지성은 오랜만에 나왔다. 물론, 그의 실력은 좋다. 범상치 않은, 재능 있는 선수이다. 다만, 골을 잘 못 보여줬다. 바로 그 때,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 환호를 하려 하는데, 심판이 잽싸게 오프사이드를 불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엔 분명 오프사이드가 아니다. 그는 흥분했다. 제 분을 참지 못한 박지성이 일반적으로 심판에게 해서는 안 되는 ‘감자 주먹’ 제스처를 하고 손으로 따발총을 쏴댔다. 어찌됐겠나? 당연히, 상벌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6경기 출장 정지, 60만 파운드 벌금’ 그리고 한 가지 더.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기간 동안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레포드에서 페어플레이 기수로 봉사할 것. 게다가 프리미어리그의 상벌위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시아 선수여서 세계 최초의 징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이를 통해 새 사람이 되고 대스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떤가, 당신은 분노하지 않을 자신 있는가? 난 못하겠다.

이천수와 박지성이어서 또 다른가, 과연 무엇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이건 징계가 아니다. 프로축구연맹이란 공조직이 공공연함을 빙자해 자행한 ‘왕따’일 뿐이다. 물론, 이천수와 박지성은 다르다. 당연하다, 다른 개체니까. 하지만 선수로서 그 둘은 같다. 공평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것 같다. 도대체 왜? 당신도 아마 박지성의 예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천수에겐 다른가? 개인의 호감, 대중적 지지도의 차이 때문에? 박지성에게 대입하면 분노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이 이천수라면 아무렇지도 않고 내심 ‘쌤통’이라고까지 생각된다면, 여지없다. 당신도 어쩌면 이 왕따의 공범일지 모른다.

프로축구연맹의 이번 징계, 한 마디로 어처구니없다. 가당치도 않다. 이천수의 행동은 이례적인 것이긴 했지만 유례없는 종류의 몸짓은 아니었다. 모든 스포츠는 룰에 의한 질서, 심판에 의한 통제를 일단,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심심하다. 스포츠는 룰과 심판에게서 일탈하려는 잠재적 변수까지를 포함하여 성립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찬호의 이단 옆차기 같은 것 말이다. 심판은 절대자이지만, 결코 독단자는 아니다. 이천수의 행위 역시 언제나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지, 파렴치한 대역죄는 아니다.

이천수를 징계하라. 단, 그라운드에 세우지는 마라. 징계 기간 중에 그라운드를 불허하는 것이 징계다. 도저히 그 행위가 용서가 안 되고 그가 미운 것이라면, 차라리 선수를 그만두라고 솔직히 말하라. ‘왕따’는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왕따’를 ‘엄친아’와 구조적으로 차별하겠다는 것은 문명의 모습이 아니다.

미디어에게도 당부한다. 이천수를 입맛대로 상품화하는 장사를 그만하라. 벌써부터 부작용이 만만찮지 않은가. 이천수를 저주하는 미디어에 부화뇌동한 프로축구연맹이 ‘프로’라는 자기규정을 포기하는 알량한 도덕의 단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프로가 프로다워야 한다면 그건 연맹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제발, 좀. 시대가 아무리 야만이라도 괴물처럼 살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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