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정치 다툼으로 경제살리기 법안이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조중동의 기사가 아니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의 아시아판 10일자 3면 ‘한국 국회의원들 주먹 싸움에 개혁 법안 쌓여간다’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해당 기사에서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 법안이 여야의 주먹싸움에 표류되고 있다”며 “야당은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노조의 감정에 편승하고 있다” “지난 몇달간 좌파들은 더 많은 시위가 일어나도록 부채질해왔으며, 이는 용산참사에 가장 효과적이었다”는 등 편파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평소의 보수적 논조를 고려할 때 크게 이상(?)할 것은 없는 내용이지만, MB악법에 대한 국민적 반대여론을 ‘노동조합’의 반발 정도로 폄하하고, 용산참사로 인한 집회를 ‘좌파가 유도한 것’이라는 식의 보도는 대한민국의 검경, 조중동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 파이낸셜 타임스의 10일자 3면 <“한국 국회의원들 주먹 싸움에 개혁 법안 쌓여간다”> 기사 온라인판.
이밖에도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명박 대통령은 월요일(9일) 라디오 연설에서 야당이 국익을 고려하기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은 ‘뉴질랜드, 호주, 인도네시아 등을 둘러보며 내내 부러웠던 것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에 여야가 따로없는 모습이었다’고 언급했다” “정부는 한미FTA가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민주당이 반대하는 것에 격분하고 있다. 정부는 해외시장 수요 감소로 곤경에 처한 한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한미FTA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등 정부의 주요한 주장들을 내보냈다.

이같은 내용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 비중있게 인용 보도됐음은 당연한 일이다.(중앙일보, 3월 11일자 2면 <“한국 경제 살리기 법안들 난투극 국회에 막혀 표류”>, 동아일보 3월 11일자 1면 <“한국, 여야 주먹싸움에 개혁법안 쌓여간다”>)

▷국회 폭력, 여야의 TV앞 힘겨루기? = 파이낸셜 타임스는 “많은 한국인들은 국회의원들이 소화기와 망치를 들고 싸우는 괴상한 모습에 대해 불평한다. 한국인들은 국회 난투극이 외국에 소개되는 몇 안되는 모습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국가적 망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정부관리들은 서로 치고받던 국회의원들이 회기가 끝난 후에는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간다며 격분했다. (국회 난투극을 막는 해법은) 텔레비전 카메라를 치워버리는 것”이라는 익명 정부관리의 말을 전했다.

지난 연말 국회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의 근본 원인은 여권이 국민의 큰 반발을 사고 있는 ‘MB 법안’을 강행처리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국민 여론 수렴은커녕 국회 내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않은 채 직권상정으로만 물어붙이려는 거대 여권에 맞서서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물음은 눈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27일 하루동안, 19살 이상 성인 남녀 1011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한미FTA 비준안 상정 과정에서 해머와 망치가 등장한 폭력 사태에 대해 ‘한나라당 책임’이라는 의견이 40.2%, ‘민주당 책임’이라는 의견이 25.7%로 나타난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신뢰구간 95%, 표본오차 ±3%).

하지만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같은 여론은 일절 반영하지 않고 지난 연말 벌어진 일을 ‘텔레비전 앞에서 여야가 힘겨루기를 하는 것’ 정도로만 해석했다. 한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희한한 구경거리 정도로 보는 듯한 이런 기사를 쓰기에 앞서 자기 나라 의회의 다수당이 수십개 법안을 한꺼번에 날치기 처리하려는 예가 있었는지 정도는 살펴봐야 하지 않았을까.

▷MB악법 반대, ‘밥그릇’ 우려하는 노조 감성에 편승? = 파이낸셜 타임스는 “야당은 (정부의 개정 법안들로 인해)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노조의 감정에 편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외신 기자의 눈에는 한미FTA, 금산분리 완화, 미디어관련법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밥그릇’을 우려하는 노동조합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각각 ‘자본의 극단적 보호주의’, ‘재벌에 은행 넘기기’, ‘재벌방송.조중동 방송만들기’라는 비판을 받는 한미FTA, 금산분리 완화, 미디어관련법 등 국민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각종 MB ‘개혁’ 법안에 대한 반대가 정말 노동조합만의 반대였던가.

▲ 중앙일보 3월 11일자 2면
이 기자도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이해 언론들이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를 접했을 것은 분명하다. 국민의 60% 이상이 방송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으며, 정부여당의 방송법 추진 이유에 대해 ‘방송장악을 위한 개정’이라고 보고 있다. 또,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정부가 내놓은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기도 하다. 금산분리 완화를 비롯해, 미디어관련법 등 정부가 ‘개혁법안’이라 칭하는 법안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희망’ 대신 ‘독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좌파 시위 유도에 가장 효과적? =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몇달간 좌파들은 더많은 시위가 일어나도록 부채질해왔다. 이는 지난 1월 경찰의 건물 퇴거로 발생한 용산 참사에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보도했다. 용산참사로 인해 벌어진 각종 집회는 좌파들이 유도한 것이라는 식이다. 폭압적인 강경진압으로 인해 발생한 용산 참사는 시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길거리에 나서게 했다. 철거민 무더기 기소, 경찰에 대한 면죄부 등 검찰의 수사 결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용산 참사.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집회에서 굳이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파이낸셜 타임스. 왜 참사 자체가 배후세력의 작품이라고 하진 않는가. 일부 대형 신문과 경찰의 시선을 넘어서지 못하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이 기사에서 배울 것은 외신도 가려서 읽어야 한다는 정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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