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열흘, 백일, 우리민족에게 아주 익숙한 기간이다.

단군선조의 모친께서 원래 곰이었으나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간청하여 쑥 한 심지와 마늘 20통으로 허기를 달래고 동굴속에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견디어 곧 사람이 되었다. 우리민요 정선아리랑은 또 어떤가?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법당 뒤에 칠성당을 모아 놓고 팔자 없는 아들딸 낳아 달라고 석 달 열흘 노구메(메밥) 정성을 말고서…” 사람이 되기 위한 인고의 세월이며, 팔자에 없는 자식을 얻기 위한 간절한 정성의 시간이 석 달 열흘, 신성한 백일이다. 한데 백일은 지난 역사나 시대만을 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영구집권을 위한 재벌과 조중동방송에 제동이 걸리자 한나라당이 하는 수없이 내놓은 사회적 논의기구의 활동기간이 또한 석 달 열흘이다.

3월5일 여야 교섭단체가 백일 간 언론법 개정안을 논의할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에 합의했다. 기구의 명칭을 한나라당은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로 고집했다. 방송을 사회제도와 문화로서, 언론으로 보지 않고 미디어로 변장시켜 산업·경제법으로 포장했다. 애초 언론노조는 ‘언론과 미디어산업 발전을 위한 국민위원회’로 제의하면서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의 공공성과 공정성이 제대로 실현되어 국민 모두에게 언론의 편익이 제공되고 산업으로서 미디어의 발전 방안을 동시에 구해보고자 했다. 위원회의 위상과 역할에서도 한나라당은 위상 축소를 위해 정치인의 참여 배제와 언론노조의 위원회 참여를 반대했다. 위원회에 여야 정치인이 참여하게 되면 자연히 위원회의 위상은 정치적으로 격상되며 논의된 결과는 입법과정에서 정치적 반영이 당연해진다. 한나라당은 여기에 부담을 느꼈다. 또한 언론노조의 위원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언론법 개악의 중심에 있는 언론노조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원회 회의 결과를 입법과정에 반영해야 하는 부담을 한나라당이 끝내 피해가려는 데 있다. 그래도 합의 내용은 “위원회 논의 결과는 상임위 입법과정에 최대한 반영토록 노력한다”고 하여 일정 부분 한나라당의 한쪽 다리를 묶었다.

▲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나경원 한나라당, 전병헌 민주당, 이용경 선진과창조모임 간사가 5일 국회 정론관에서 미디어법 관련 사회적논의기구에 대한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여의도통신
3월2일 여야가 “백일 간 사회적 논의 기구를 만들어 여론을 수렴하고 6월 국회에서 표결 처리한다”고 처리 시기와 방법을 못 박아버리자 언론노조는 합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위원회 참여여부는 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할 것이라는 매우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 후 구체적인 위원회 구성과 역할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참여를 결정했다. 여야 동수의 위원추천과 논의 결과를 입법과정에 최대한 반영토록 노력한다는 것을 일정부분 평가한 것이다. 그보다 한나라당은 논의기구의 결과와 관계없이 6월 국회에서 표결처리를 고집한다. 그때 표결처리 강행을 제지할 주체는 국회 밖의 언론노조나 시민사회가 아니다. 상황파악은 냉철해야 한다. 상식이 파괴된 한나라당 세상에서 의회 밖의 파업과 시위는 더는 유효하지 않다. 민주당 등 야당만이 한나라당의 독선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집단은 민의를 대변한다지만 이해를 구분한다. 결국 6월 국회에서 야당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 주고 태클을 정당화해 줄 국민적 여론이 필요하다. 재벌방송, 조중동방송 반대의 압도적인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언론노조가 제도권에서 활동하며 선도해야 한다.

앞으로 언론법 개악의 논의 중심은 위원회가 된다. 모든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소스이며 백일 간 뉴스의 중심이 된다. 조직과 인력이 준비된 언론노조가 위원회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백일 후 위원회가 합의를 끌어내든 그렇지 않든 결정은 국회가 한다. 언론노조가 외곽에서 위원회를 부정하면서, 또는 인정하면서 제 삼자를 통해 언론법 개악 반대를 외쳐봐야 국회 울타리 밖이다. 백일 후 투쟁할 공간과 명분을 확보하지 못하면 언론장악할 뜻이 없다고 허언을 일삼는 재벌과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선의를 굳게 믿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다. 지금 허리를 꺾어 비굴해도 백일 뒤 당당히 허리를 펴는 것이 바른 전술이다.

석 달 열흘이면 그리 짧은 시간 아니다. 위원회에 참여할 인사의 추천도 마무리가 되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를 쉽게 알려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위원회의 회의는 공개하도록 해야 하고 회의는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와 누구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민들의 참여를 위해 지역을 순회하며 설명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근거없는 경제살리기 쇼를 객관적인 수치로 바로잡아야 하고 연일 왜곡보도로 방송을 쥐어보려는 조중동의 아웃운동은 언론악법 저지의 첫 번째 의제이어야 한다. 위원회가 객관적인 여론을 측정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고 관철시켜야 하며 마지막에는 한나라당이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국민적 반대를 끌어내는 것이 과제이어야 한다.

나른한 봄에서 성하로 치닫는 백일 동안 언론노조의 장정은 우리민족의 처음이 그랬듯이 쑥과 마늘이 위장벽을 파고드는 고통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쑥과 마늘은 석 달 열흘간 언론노조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뱀파이어(흡혈귀)에게 마늘과 햇빛은 곧 죽임이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 좋겠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최상재)은 전국 150여개 언론사 노동조합과 조합원 1만8000여명이 속한 전국 단위의 산별노조입니다. 분야별로는 신문, 방송부터 인터넷매체, 출판, 인쇄, 광고, 언론관련기관까지 다양합니다. 언론노동자의 권익 향상은 물론 언론자유 및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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