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의 서울중앙지법장 시절 ‘촛불재판 개입 의혹’이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애초 신 대법관이 인사청문회에서 부인한 것과 달리 재판 몰아주기 배당, 이메일, 전화 통화에 이어 개별 면담까지, 각종 압박성 행위에 대한 제보가 속속 제기되고 있다.

<노컷뉴스>는 10일 오전 복수의 법원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지난해 7월말 야간집회금지 조항 위헌심판을 제청한 박재영 판사를 수차례나 따로 법원장실로 불러들였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박 판사는 지난해 7월25일 광우병대책회의 안진걸 조직팀장에 대한 첫 공판에서 판사로서 고뇌를 내비치며 촛불 집회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언론보도와 관련해 일종의 ‘주의성’ 호출로 법원장실에 불려가 신영철 법원장으로부터 ‘말썽이 나지 않도록 주의해달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 뒤 박 판사가 지난해 8월11일 안 팀장의 보석을 허가한 후 안 팀장의 변호인단이 재판부에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 제10조 야간옥외집회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 심판제청을 신청하자, 신 법원장은 또 다시 박 판사를 법원장실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 판사는 10월9일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했고, 헌재 결정이 날 때까지 안 팀장에 대한 재판을 연기했다.

▲ 조선일보 2008년 8월 14일치 사설
신 법원장이 수차례 ‘방으로’ 불렀다는 박재영 판사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일보>가 지난해 8월13일치 지면에서 사진과 실명을 공개하며, 판결 발언들을 일일이 비판했던 기사의 주인공이다. 당시 조선은 10면 기사 ‘판사가 불법시위 피고인 두둔 발언’에서 “피고인을 두둔하고 현행법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사견을 드러내 물의를 빚고 있다”면서 기소된 광우병대책회의 안진걸 팀장이 “문화제 형식의 합법 집회에 참여하겠다”고 답하자 “이같은 대답을 듣고도 보석을 허가한 것은 재판부가 사실상 재범을 방조한 것으로 풀이된다”며 박 판사를 몰아세웠다.

이뿐 아니다. 조선은 그 다음날(8월 14일) 사설 ‘불법시위 두둔한 판사, 법복 벗고 시위 나가는 게 낫다’에서 “이런 판사가 아직껏 판사 노릇을 하고 있는 사법부의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면서 “이 판사는 자신이 그 동안 촛불시위에 나가지 못하게 했던 거추장스러운 법복을 벗고 이제라도 시위대에 합류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면을 통한 조선의 ‘박 판사 압박’은 실제로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법장을 통해 ‘면대면’으로 실현됐다는 증언들이 지금 쏟아지고 있는 셈이다. 박재영 판사는 올해 2월초 “내 생각이 정권의 방향과 달라 공직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말을 남기고 법원에 사표를 냈다.

최근 조선일보가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의혹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남다른 애정(?)이 엿보인다.

▲ 조선일보 2009년 3월 7일치 사설
조선일보는 지난 7일치 사설 ‘사법부 비판을 넘어선 조직적 사법부 공격’에서 “이 사건은 일부 판사들이 좌파 신문과 TV에 이 이메일을 제공해 폭로, 알려지게 됐다”면서 신 대법관의 재판관련 발언에 대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며 “자기 성향이 맞지 않는다고 법원 내부의 일을 외부에 조직적으로 폭로하거나 일부 언론과 편을 짜 법원 내부 인사에 대해 인민재판식으로 집단 몰매를 가하는 것은 건전한 사법부 비판을 벗어난 사법부를 향한 파괴공작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는 10일치 기사 ‘재판외압 비판이 사법부 파괴공작…조선 ‘이상한 논리’에서 조선의 보도에 대한 비판여론을 전하며 “비판의 핵심은 법원장이 법관과 재판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중요한 사건임에도 조선이 사건의 본질과 동떨어진 좌우 이념대결로 몰아 초점 흐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한나라당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먼저 나서서 ‘색깔론’을 꺼내들며 ‘신 대법관 편들기’에 적극 앞장선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신 대법관은 조선일보에서 알아주는 애독자인 것 같다.

쏟아져나오는 개입 의혹에 대해 ‘일단 지켜보자’며 신중을 기하던 한나라당도 지난 7일 조선의 ‘애독자 인증 샷’이 떨어지고 난 이후 ‘신 대법관 구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드디어 침묵을 깨고 9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할 세력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겠나”며 신 대법관을 두둔했고, 또 다른 조선일보 애독자로 보이는 주성영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같은날 MBC라디오와 인터뷰에서 “정치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인 법관들이 사법부 흔들기 한 것 아니냐, 정권이 바뀌었으니까”라고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 한겨레 1994년 8월 20일치 만평 ‘한겨레 그림판’
법복을 입은 판사에게도 빨간색을 칠하려 드는 모습은 지난 1994년 당시 박홍 서강대 총장이 “주사파 5만명이 학계와 정당, 언론계, 종교계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떠들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한겨레> 만평을 그리던 박재동 화백은 박 총장이 “사실은 나도 주사파다”라며 폭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그려 ‘시대의 광기’를 풍자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조선일보와 조선일보 애독자들 간에 서로의 주장을 주고 받으며 색깔론을 확대재생산해가는 방식이다. 우리의 시대는 15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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