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힘겹게 책을 읽어내려갔다.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 기술한 다른 책들도 쉽사리 읽히지는 않았지만 그것들과는 약간 다른 형태의 무언가가 가슴을 짓눌렀다. 예리한 송곳이라기 보다는 둔탁하고 육중한, 그래서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몽둥이가 지긋히 심장을 내리누르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이 책이 단순히 ‘히틀러’에 대한 책이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힘겹게 읽어내려간 것보다 더 힘들게 서평을 썼다. 아마 부탁받았던 것이 아니었다면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미련도 없이 지워버렸다. 목이 턱 막혀있었지만 한마디도 새어나올 틈도 없이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서 그저 글자수만 채워놓은 서평이 맘에 들긴 힘들었다. 게다가 난 솔직히 말하자면, 교육 혹은 청소년들에 대해 진보물 먹었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정도 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 학생들

그렇게 서평을 부탁한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냥 나몰라라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일제고사와 관련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서울의 일부학교가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운동부 학생들을 시험을 보지 않게 했다’는 기사와 ‘서울지역 3개의 특수학교가 학업성취도 평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누구는 시험 안봤더니 담임선생님이 짤리는데 누구는 시험을 볼 기회조차 박탈하는 넌센스도 황당했었지만, 그보다는 <히틀러의 아이들>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저, 손정숙 역, 지식의풍경, 2008
소년소녀들은 스스로 신체 건강하며 유전병이 없다는 것도 증명해야했다. 인종 검증을 통과한 신체 장애아들에 한해 ‘장애 및 허약자 히틀러청소년단’이라는 특별반 가입이 허용됐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부모가 아무리 충성스런 나치당원이라도 청소년단에 가입할 수 없었다. (책 34쪽)

나치가 인종주의와 우생학을 기반으로 이른바 ‘불순물’을 제거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성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없는 아이들을 분리해 낸 것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애정을 망각하고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는 국가 교육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나치와 이명박 정부는 놀랍게 닮아 있다.

파시즘 국가의 전쟁 수행을 위해서만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아이들과 돈벌이의 능력과 그것의 기반이 될 학벌사회에서의 성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아이들 중 누가 더 슬플까?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대인과 혹은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더 이상 한 몫의 인간일 수 없었던 것처럼 한국에서 공부를 못하거나 성적이 나오지 않는 아이들은 학교와 교육청에 구차한 짐일 뿐인 것인가?

히틀러의 아이들

비극적이게도 히틀러 시대의 아이들은 이러한 나치의 교육정책에 적극 동조했다. <히틀러의 아이들>은 단순히 나치에 이용당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행동한 열성적인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정치나 사회에 대해서 관심 없다는 어른들의 불평에 대한 아이들의 반감을 히틀러는 다만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1930년대 무기력했던 독일의 기성세대들이 주지 못한 것을 히틀러는 자극했다. 모험과 탐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의 표출과 정치적 주체로서의 적극적 행동. 히틀러 청소년단(Hitler Youth)은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치의 사상과 근대국가의 국민-국가전쟁에 언제라도 동원될 수 있는 인력-으로 갖추어야 할 몸과 마음을 습득해갔다.

물론 모두가 히틀러 청소년단에 열광한 것은 아니다. 외국 라디오 방송 청취를 금지하는 나치의 법을 어기고 나치 독일의 만행을 전단지에 인쇄해 뿌렸던 헬무트 휴베너, 백장미단의 한스 숄(그는 한때 히틀러 청소년단의 단위조직 지휘책임자이기도 했다)과 소피 숄 등의 이야기도 책에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소피 숄은 사형선고를 전해듣고 “우리의 행동으로 숱한 사람들이 깨어나 행동하게 된다면 내 죽음쯤은 아무것도 아니다.”(150쪽)고 말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더 가까운 법이다. 이미 많은 독일의 학생들은 나치의 교육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다.

뮌헨 대학생들은 소피의 기대와는 달리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그 대신 한스와 소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가 처형된 지 두 시간 만에 친나치 집회를 열어 정부에 충성을 표했다. (151쪽)

이명박의 아이들?

불행 중 다행일까? 히틀러에게는 괴벨스가 있었지만 이명박에게는 유인촌이 있다. 아무리 봐도 히틀러와 괴벨스 콤비보다는 이명박과 유인촌 콤비가 훨씬 무능해 보인다. 히틀러는 아이들에게 흥분과 모험을 약속하였고 아이들은 스스로 나치가 되어갔다. 이명박은 아이들에게 광우병소고기 급식과 일제고사를 약속하였고 아이들은 스스로 촛불이 되어갔다. 정권의 무능력 때문인지, 아이들의 높은 정치의식 때문인지, 아무튼 이명박에 열광하는 아이들은 쉽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사실 아이들을 바라보는 한국 어른들의 눈은 당시 독일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방신기와 던젼앤파이터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먹거리와 그것에 대한 권리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우리 어른들이 아닌가.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그들을 ‘미숙한 아이들’로만 바라보며, 우리가 너희를 지켜줄게라고 외치며 촛불집회로 뛰어나간 우리들이 아닌가.

이명박은 아이들마저 적으로 돌아서게 했지만, 누군가는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욕구를 히틀러처럼 악용할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스스로 나치가 되어가는 것이 두렵다면, 혹은 경쟁과 차별을 몸과 마음에 각인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러한 사회구조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는 우선 인정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가장 왕성하고 적극적인, 게다가 충분히 성숙한 정치적 열정을 가진 주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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