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안타까운 게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조선일보 이야기다. 어제(3/9) 조선일보의 사외 고정 칼럼인 ‘아침논단’에 서지문 고려대 교수가 쓴 ‘신사임당의 참 얼굴’이란 글이 실렸다. 새로 발매될 5만원권에 쓰일 신사임당 얼굴에 관한 일종의 인상비평(Impressionistic Criticism)이었다.

▲ 조선일보 9일치 A30면
인상비평이란, 주관적 인상을 바탕으로 직관적으로 비평하려고 하는 태도를 일컫는 용어다. ‘그까이꺼 뭐 대충’ 그럼 개나 소나 할 수 있단 얘기 아니냐고 하겠지만, 좋은 인상비평은 사물과 현상의 평면적 객관성을 뛰어넘어 마치, “뱃사공이 양쪽 강기슭의 풍물을 승객에게 설명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 주관성을 획득하는 행위로 승화되기도 한다. 서지문의 신사임당 인상비평은 어떠한가? 그런, 절대적 주관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상비평의 전형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 서지문의 글은 ‘타인의 작품을 이용하여 결국 자기를 진술’하는 비평의 주관적 독단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대학교수의 수준이 이러하니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막히면 돌아가랬다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비평의 방식에는 여러 접근이 있을 수 있고, 방식 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의 우월은 없다. 인상비평의 오류를 견제할 수 있는 비평의 방식을 꼽자면, 재단비평(Judicial Criticism)이 가장 유효하지 싶다. 재단비평은 가능한 주관을 배제하고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입장 등의 일정한 기준 하에 설정된 외적(外的)객관성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비평의 방식이다.

예컨대, 서지문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김용옥 비판이 일종의 재단비평 방식이었다. 지난 2001년 장안의 화제였던 ‘논어 논쟁’ 당시, 서지문은 김용옥이 공자를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으로 스타가 됐었다. 한마디로, 공자에 대한 김용옥의 인상비평을 재단비평으로 해체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동양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나는 당시의 논쟁에서 누가 옳았는지를 판단할 순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비평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를 서지문이 사실관계의 문제로 치환해버렸다는 것 정도를 어렴풋이 겨우 이해했다.

▲ 5만원권 신권 도안 ⓒ 한국은행
각설하고, 서지문의 어제 글로 돌아가 보자. 5만원권 화폐를 본 서지문의 주관적 인상을 재구성하면 이런 것이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텔레비전 사극에 동네 아낙이나 주막집 주모 역으로 나오면 알맞을 여성의 얼굴”이다.

서지문이 생각하는 신사임당은 이렇다. 그녀는 ‘유교적 여성억압에 찬성하고 협조함으로써 ‘출세’한 여성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한 해석적 증거는 신사임당이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했고, ‘유약했던 남편을 계도하며 독려했던 일화’이다. 결국, 그러한 과정을 겪다보니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그림이나 글씨, 시가 불과 10여점’에 불과하다. 즉, 신사임당은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보기에 ‘무엇보다도 정감이 넘치는 따뜻한 인품의 소유자’이자 ‘타고난 예술가’인 신사임당의 얼굴은 ‘인품과 아량과 재능과 덕성이 저절로 배어 나오는, 이상화된 모든 한국여성의 모습’과 ‘아우라’가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5만원권 초상화의 ‘매우 미약한 예술성’으로 인해 ‘또 한 사람의 위인이 격하되어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다.

간단한 얘기, 장황한 설명이다. 서지문은 얼핏 떼쓰는 것 같기도 하고,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총각도사처럼 누구나 꿸 수 있는 걸 혼자만의 재주인냥 뽐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해체해보자. 서지문의 글에는 2명의 여성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여성을 이해하는 서지문 개인의 인식이 적확하게 표상된 얼굴일 것이다. 한 명의 여성은 동네 아낙이다. 구체적으로는 주막집 주모로 표상되는 ‘하찮은’ 얼굴이다. 그리고 이 여성을 또다른 여성이 내려다 보고 있다. 정확히 대비를 이루는 이 또 한 명의 여성은 이상적 한국 여성이다. 구체적으로 재능과 인품의 향기가 완연한 여성이다. 서지문은 이 둘 사이를 오가지 못한다. 이 두 여성이 결합하는 고상한 추체험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서지문의 충격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사임당이란 ‘이데아(idea)’의 ‘실재(reality)’가 동네 아낙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포이다. 신사임당이라고 하는 여성 위인이라면 무릇 고상하고 단아한 풍모여야 한다는 강박은 남성의 지배적 시선을 규범적으로 내면화한 여성의 병리적 심리상태다. 그녀는 가부장 포비아(phobia)이다.

공포에 질려서인지 서지문은 오락가락한다. 서지문이 생각하는 ‘출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사임당의 ‘출세’가 적어도 유교적 여성억압에 찬성하고 협조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사회 구조에 찬성하고 협조하지 않고서 이룰 수 있는 ‘출세’가 있긴 한 걸까? 그러곤 다른 이유를 내세운다. 신사임당이 큰 인물인 이유는 가부장제의 억압에 신음했던 하찮은 일들 때문이란다. 아니면 결정적으로 잘 키운 한 아들 때문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헷갈린다. 그녀가 남긴 10여점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일말의 해제도 없다. 오로지 ‘타고난 예술성’이란 수사의 부속물로 활용될 뿐이다. 내심 갖게 되는 그 빈약한 물량에 대한 궁금증에는 그녀가 유교적 부덕(婦德)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는 신사임당이 5만원권에 쓰이는 것에 소심하게 반대했다. 나의 반대는 5만원권 이후에 벌어질 약간의 인플레가 약간의 부작용을 낳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1차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이제 대범히 반대한다. 불편해서 불쾌하다. 신사임당을 추앙하는 서지문 같은 이들 때문이다. 백수였던 남편을 받들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일곱 자녀를 손수 가르치느라 자신의 자아실현은 계속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신사임당의 삶을 동네 아낙과 완전히 분리해내는 그런 허위의식들 말이다. 여성의 얼굴에 대한 확고불변한 상을 모시고, 훌륭한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변하지 않는 세상은 그저 또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권하는 똥만 가득 찬 관념적인 정신머리들 말이다.

서지문이 과거에 했던 말은 이제 그녀에게 도로 돌려주며 끝내야겠다. 어느 인터뷰에서 서지문이 김용옥을 평하길, “김씨는 공자가 제시했던 군자상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서지문은? 서씨는 동네 아낙이 제시했던 생활상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과연, 조선일보가 서지문의 입을 빌려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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