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게 졌다. 영어보다 야구용어를 먼저 알았던 보편적(!)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쿨’하게 말하건대, 일본한테 이기기보다 지기가 쉽다. 역사, 통계, 지표, 문화 등 모든 주/객관적 조건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그렇다. 물론, 공은 둥글다 보니 그러한 주/객관적 조건을 뛰어넘는 승부도 나오기 마련이다. 지난 2006년 WBC가 그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그랬다. 물론, 연속 두 번의 상황이라면 우연이 아니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이번엔 일본에 졌다.

이기는 것이 감격적인 승부라면, 지는 것은 당연한 게임이다. 패배가 재앙이란 호들갑은 너무 선정적이고 지나치게 몰이성적이다. 주/객관적 조건이 야구보다 훨씬 대등한 축구도 아니고, 야구에서 일본에 패배했다고 특별히 더 분노해야 할 까닭은 없다.

과거 이치로가 당했던 굴욕에 비하면, 엊그제 김광현은 굴욕이랄 것도 없다. 그는 이제 갓 스물이 넘은 투수이다. 그의 교체 시점을 두고 말들이 많은데, 뭐랄까. 갓 스물이 넘어 리그를 이미 재패한, 국가대표팀 부동의 에이스 투수를 1회에 내릴 수는 없었지 싶다. 그건, 너무 비인격적 처사이다. 일본에게 한 게임 질 수 있지만, 김광현은 앞으로도 숱하게 이겨야 하는 선수다. 그도 배웠을 것이다. 배려를 느꼈을 것이다. 김인식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 WBC 관련 보도로 구성된 네이버의 특별 페이지 캡쳐
엊그제의 진정한 패배자는 언론이다. 언론은 국가대항전만 만나면 저널리즘의 기본을 잊는다. 고질적이고 또 반복적이다. 일본전 하루 전날인 3월6일(금) 언론은 국가대표팀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렸다. 한국은 대만에 9대0으로 낙승했고, 일본은 중국에 4대0 예상 밖의 신승을 거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중국전 5타수 무안타에 그친 이치로의 부진을 집중 부각하며, 한국팀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는 단정적 보도를 쏟아냈다. 대략적인 보도 태도를 요약하면, ‘대만은 우습다, 일본 나와라!’, ‘김광현, 마쓰자카 잡는다’ 정도였다.

물론, 언론이 승리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은 경기를 앞두고 무조건 비관적 전망을 내놔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깔끔한 객관성이 대목 장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짚을 건 짚어야겠다. 중요한 국가대표 경기 때마다 반복되는 스포츠 찌라시들의 담합적 보도 태도, 정말 못 참겠다.

스포츠 찌라시들의 단세포적인 면은 일본전 패배 이후 극적으로 드러났다. 이제 와서 ‘예고된 패배’이니, ‘패배보다 더한 망신’ 하는 꼴은 우습다니, ‘전술, 투지, 정신력 모두 졌다’니 하는 꼴 등은 그야말로 가당치 않다.

아니, 예고된 패배를 앞두고 왜 이긴다는 설레발은 쳤나? 패배보다 더한 망신을 당한 것은 이길 수 있다는 주술을 기사로 써댄 기자들이 아닌가? 불과, 하루 전 김인식 감독의 용병술을 극찬하다가 어찌 코칭스태프를 탓하는가? 아니면, 선수들이 집단적으로 태만하기라도 했나? 대체 무슨 근거로 전술, 투지, 정신력 모두 졌다는 것인가. 이쯤 되면, 개그콘서트를 빌리지 않을 수 없다. ‘기사 쓰기 참 쉽죠~?’

이미 대회전부터 많은 야구 블로거들 사이에선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르지 않은 김광현이라면?’이란, 의문들이 많았다. 김광현은 위력적이되 구질이 단순한 편이다. 결정적으로 ‘일본킬러’란 별명을 얻은 지난 승리들을 뒤집어 말하면, 경험과 데이터에 의한 분석을 중시하는 일본 야구에 충분히 분석이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성과 심층성을 기본으로 하는 저널리즘이라면, 김광현과 류현진의 임무 교대 정도는 사전에 제안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설레발을 쳐놓고, 지고 나니까, 한국의 고교 야구팀이 53개인 것에 비해 일본은 4163개교라는 등의 기본적인 인프라 차이가 있어 지는 게 당연하다는 따위의 분석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총제적으로 무능하고, 결정적으로 비겁하기까지 한 태도이다.

오늘, 다시 일본전이다. 한국은 좌완 봉중근을 선발 예고했고, 일본은 지난 시즌 사와무라상과 MVP를 휩쓴 라쿠텐의 에이스 이와쿠마가 등판할 예정이다. 하라 일본 대표팀 감독이 여전히 “한국에 대한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큼 한국팀의 위력은 만만치 않다. 솔직히 이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의 승리 기원은 ‘복수’나 ‘국민적 승리 기원’의 일환은 아니다. “일본에게만은 2번 패배할 수 없다”는 식의 낡은 보도, 그만 봤으면 좋겠다. 야구 기자들아, 공부 좀 해라!

더이상 마침내 의지로 승리하는 인간과 백의민족의 한을 통쾌하게 메치는 한판이 난무하고 문자 그대로 ‘감격시대’가 아니다. 물론, 또 질 수도 있다. 충격받는다고 호들갑 떨지 마라. 그것 아니어도 충격적인 일 많다. 부디, 오늘은 20년 가까운 세월을 새벽잠 마다며 운동에 매달렸을 인생들이 콜드게임패하지 않길 바란다. 조금 더 기대한다면 자유롭고 자발적인 창조성으로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는 생동적 몸짓을 목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