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는 말했다.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음악이 내게 찾아온다. 그 충동은 내 안의 주체할 수 없는 격렬함에서 끊임없이 솟아난다"고. 이번 주말기획은 편집자주를 쓰기가 망설여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음악에 언어를 붙힐 만큼 그 소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다만, 한대수를 좋아할 뿐이다. 답답할 땐 마이앤트메리의 '공항가는 길'을 듣고, 뭔가 서늘한 영감이 필요할 땐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는다.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말할 순 없다. 어느 누구도 소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순 없다. 음악은 소리에 관한 만족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감성의 '간지'이다. 어느 날, 갓 샤워를 마치고 촉촉한 기분에, EBS <스페이스 공감>을 보며 맥주 한 캔을 마시면 어른이 됐다는 걸 참 다행스럽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이번 주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는 EBS <스페이스 공감>이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TV속 음악의 어떤 경지이다. 교양 프로그램이 몰살당하는 시절이다. 그 500회 감읍 또 감읍이다.

디지털 음원의 상업화와 저작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0년대 초반, 다수의 관계자들은 음반시장의 축소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라이브 공연의 활성화를 예견했다. 좋은 곡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음악인은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고, 뛰어난 라이브 실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결국 도태될 것이란 얘기였다. 외견상 이 견해는 일정 부분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상품으로서 앨범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면서 디지털 음원으로 데뷔하는 음악인이 늘어나고 있으며, 큰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중소규모의 공연장도 여럿 들어섰다.

하지만 속내를 들춰보면 예전보다 상황은 훨씬 나빠졌다. 디지털 음원의 판매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수 있을 만큼 수익을 올렸다는 음악인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공연은 손익분기점조차 맞추기 힘들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이 현실을 야기한 근본 원인 중 음악 외적인 구조적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 <째즈, 클래식을 품다> 공연 이미지ⓒEBS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다수 음악인의 생각은 소박하다. 열심히 곡을 쓰고 연습해서 세상에 내놓으면 결국 사람들이 그 순수함을 알아줄 것이고, 바라건대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소득도 뒤따라오지 않겠느냐는 것. 원론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들의 마음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옳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감동을 얻기 위해선 당연히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그들에게 가야할 금액의 상당부분은 전산망에 머물러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불법 음원을 다운받으며 공공연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일거에 해결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아무리 좋은 곡을 연주하는 음악인이라 해도 대중에게 노출될 기회를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는 팬들이 음반시장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 또 모를까, 열악한 경제사정은 음악 듣기를 뒷전에 제쳐두게 한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나라의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을 선보이고 있다. 그 근간을 이루는 록과 팝은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으며, 재즈 또한 외국 연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뛰어난 음악인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시장은 죽었는데 음악이 발전하고 있다는 현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다. 훌륭한 곡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좋은 경제적 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긴, 역사적으로 시대를 뒤흔든 명곡 중 상당수는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기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한 순수함에서 비롯됐다. 상황이 이쯤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좋다는 음악이 모두 어디에 있느냐’는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겠다. 최근 500회 방송을 내보낸 EBS “스페이스(SPACE) 공감”은 2004년 4월 이 모순의 세상 속에서 태어났다. 매주 다섯 번의 무대로 작년 4월에는 뜻 깊은 1,000회 공연을 돌파했고, 이 라이브는 편집된 프로그램으로 한 주 두 차례 방송된다.

방송국마다 음악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있지만 과연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음악계의 상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모르긴 해도 일선의 제작진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이 고민을 되뇌지 않을까. 비록 시장이 죽어 있다고는 하나, 이 프로그램들이 음악계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일선 PD들의 뇌물 수수 사건을 상기하자.) 더구나 음악으로 충만해야 할 FM 방송마저 대부분 제한적인 음악만 다루면서 여느 예능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모든 방송국의 제작진에게 언제나 공영성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상업성을 최우선하는 마인드가 궁극적으로 ‘모두 함께 죽는’ 미시적 관점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핵심은, 충분한 숙고 끝에 내려지는 편성의 균형감이며, 그 근거는 우리 음악과 사회의 진정한 힘이 다양성을 양분 삼아 자라난다는 데 있다.

▲ 지난 2월 공연했던 싱어송라이터 이장혁ⓒEBS
우리 음악계에 다양성이 존재하는가.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바탕으로 판단하면 이를 거론하는 자체가 무색하지만, 나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매우 다양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판단을 갖게 한 음악인의 상당수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인디 밴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각에서 형성되고 있는 견해, 즉 알려질 기회만 가지면 인디 밴드도 경쟁력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인디 밴드 중에는 불필요하게 과대평가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이 주류 음악계의 입김에 밀려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동정어린 시각도 조심스럽다. 공영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균형감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인디 밴드의 음악도 우리 음악의 전체 테두리 안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의 가장 큰 존재 가치는 바로 다양성의 제고에 있다. 경쟁력 운운하며 다시 한 번 상업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이들을 대하는 가장 천박한 태도다.

개인적으로 지난 2년 동안 EBS “스페이스 공감”의 기획을 함께하면서 참으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이 프로그램 또한 여러 난제 때문에 어렵사리 유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와 높지 않은 시청률 때문에 출연에 동의하지 않는 음악인이 종종 있으며, 최소 1시간 이상 모든 연주를 라이브로 펼쳐내야 한다는 전제 때문에 무대에 올리지 못하는 좋은 음악도 많다. 현재 이 프로그램의 지향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오답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흔히 음악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어느 음악인에게 출연할 기회를 줄지 저울질하는 태도를 갖는데, 이는 크나큰 착각이다. 진실은 정반대, 그 음악이 있어서 프로그램이 존재할 수 있다. 바로 이 마음가짐이 지난 5년 동안 EBS “스페이스 공감”을 있게 했다. 혹시라도 그것을 망각한다면, “스페이스 공감”이 내건 캐치프레이즈 “그곳에 가면 진짜 음악이 있다”는 되레 음악을 욕보이는 오만일 것이다.

갖은 고생 끝에 데뷔한, 촉망받는 어느 밴드가 지난 1월 더없이 인상적인 첫 앨범을 발표하며 EBS “스페이스 공감”에 섰다. 밴드의 한 멤버가 마이크에 입을 맞춘 채 “음악을 위해 앞으로도 직업을 갖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의 말이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과연 그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EBS “스페이스 공감”에는 언제나 진짜 음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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