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의 쟁점이던 미디어관련법이 결국엔 “100일간의 문방위 소속 ‘사회적 논의기구’에서 논의한 뒤 6월 국회에서 ‘표결’ 처리한다”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합의에 따라 봉합됐다. 이렇게 등장한 3·2합의문, 과연 어떤 이들의 작품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 3월 3일자 경향신문 3면 기사

<경향신문>은 오늘 3일 3면 ‘쟁점법안 벼랑 끝서 봉합’ 기사에서 “청와대 각본·한나라당 연출·김형오 주연 ‘1박2일 치킨게임’”이라고 규정했다. 한 문장으로 잘 표현한 평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3·2 합의문을 두고 좀 더 입체적인 역할 분석이 필요해 보였다. 민주당이 4개월에서 100일로 논의기간을 역으로 축소 제안한 것에 대한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고, ‘사회적 논의기구’와 ‘100일’이라는 타의에 의해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채울지 계획을 세우려면 말이다.

김형오 의장, ‘직권상정 할 수 있다’에서 ‘안한다’로…그리고 다시 ‘한다’

먼저 이러한 ‘극적 타결’(?)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은 다름이 아닌 김형오 국회의장. 그는 어떤 플레이로 3.2합의문에 기여했을까?

▲ 3월 3일자 조선일보 4면 "한나라 모처럼 일치단결…정국주도권 되찾나" 기사 중
<조선일보>는 “한나라 모처럼 일치단결… 정국주도권 되찾나” 기사에서 김 의장을 ‘고도의 전략가’로 묘사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5일 한나라당이 미디어 법안을 소관 상임위에 전격 상정한 이후 김 의장은 미디어법안의 직권상정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입장을 취해왔다”며 김 의장 측 인사의 인터뷰를 통해 “김 의장은 모호한 입장을 취해 여야가 서로 우세를 확신할 수 없게 함으로써 협상장으로 이끌어내 정국 파행을 막기 위한 전략을 쓴 것”이라고 밝혔다. 또 “김 의장은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했을 때 예상되는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반대의 경우 민주당이 김 의장을 믿고 협상에 비타협적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국회운영 전략이었다”고 김형오 의장을 추켜세웠다.

<동아일보>도 “2일 여야가 전격적으로 쟁점 법안 처리를 막판에 타결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압박 카드가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이라고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김 의장은 2일 오전 미디어 관계법 등 법안 15건을 직권상정하기로 결심하고 심사기일을 지정했다”다면서 급기야 흔들리던 민주당이 먼저 ‘100일 논의 후 표결 처리’라는 협상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3·2합의문 도출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역시나 김형오 의장이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국회의장이 가진 ‘직권상정’이라는 무기를 맘껏 휘두르며 민주당을 협상테이블에 앉힌 것은 바로 김형오 의장이었다.

정세균 대표, 민주당 ‘100일 논의 후 표결 처리’ 먼저 제의

3·2합의문의 주역으로 정세균 민주당 대표도 빠질 수가 없다. 그를 협상테이블에 앉힌 이는 김형오 의장이었더라도 합의문을 제안하고 사인한 것은 정세균 대표였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본격적인 입법전쟁의 시작은 지난 1일 오후 3시 한나라당 박희태,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협상’에 나서면서였다”고 전했다. 또한 중앙일보 역시 “2일 합의가 원내대표들의 능동적 리더십에 의해 성사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1~2일 네 번이나 협상을 벌였고 극적 타결을 이끈 2일 담판도 두 대표가 매듭지었다”고 기록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혜영 원내대표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겨레>는 2일 오전 정세균 대표에게 김형오 국회의장이 전화를 했다면서 “한나라당이 반대하니 민주당이 좀 더 진전된 안을 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에 ‘처리시안 지정’ 또는 ‘표결처리’, 둘 중 하나를 민주당이 받으라는 것이라고 풀이된다고도 했다. 의장이 무려 15개 직권상정 목록을 발표하자, 당혹감에 빠져있던 민주당은 결국 김형오 의장이 협상시한으로 정한 오후 3시에서 20분을 남긴 오후 2시40분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를 통해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만났고, 그 안에서 ‘표결처리’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3·2합의문 틀이 완성됐다.

이러한 합의문에 대해 민주당 의원들 다수가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향신문은 “이날(2일) 합의 이후 3시간 넘게 열린 의원총회에서는 의원 40여명이 한나라당과 김형오 국회의장은 물론 ‘전략도, 기세도 한나라당에 졌다’며 당 지도부를 비난했다”며 조정식 원내대변인은 “많은 의원들이 합의안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결정은 지도부에 위임했다”고 전했다. 민주당 의원들 역시 반대하면서도 그 결정을 모두 지도부에 맡긴 것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3·2합의문은 완성됐다.

김형오 의장이 직권 상정하겠다고 발표하고 나서 누구보다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정세균 대표였다. 이 모든 결정의 당사자였던 정세균 대표는 오늘 3일 ‘당원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치솟고 있는 암울한 경제위기에서 국민들을 또다시 거리로 불러내는 투쟁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며 “국민의 입장에서 타협을 결단했다”고 밝혔다.

▲ 3월 3일 발표된 정세균 대표의 당원에게 보내는 서신 중 일부

이 서신에서 정세균 대표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당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과 일부를 잃는 한이 있더라고 국회를 파국으로 만드는 것은 ‘우’라는 주장이 있었다”며 후자를 택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결국 철저히 당을 위한 선택이 아닌 국민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심이라고 믿어줄 국민들이 있을까 모르겠다. ‘경제가 어려운데’라는 핑계는 그동안 한나라당이 줄기차게 해온 말이며, 그렇다면 국민들을 위해 ‘표결처리’해서 신문방송 겸영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3·2합의문의 숨은 공로자 한나라당 중진들, 그 속의 이상득 형님

그러나 3·2합의문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표결 처리한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민주당에서 ‘과연’, ‘왜’, ‘먼저’ 사회적 논의 기간을 4개월에서 100일로 낮추었냐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중앙일보의 “상처받은 원내대표”기사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타 신문사에서는 결코 주목하지 않았던 홍준표 원내대표의 이야기.

▲ 3월 3일자 중앙일보 4면 기사
이 기사에서 중앙일보는 “협상이 끝난 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171석 여당의 힘을 제대로 발휘해 야당의 기를 꺾었다’고 자평했다”면서 “그러나 사실 홍 원내대표는 이번에도 막판까지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에 대한 확약을 얻어내지 못해 애를 태웠다”며 오히려 “김 의장이 직권상정을 결심한 것은 홍 원내대표보단 이상득 의원 등 한나라당 중진들의 설득이 주효했다”는 것이 정설이라 전했다.

실제 경향신문 인터넷 판 “‘선별적 직권상정’서 3일 만에 마음 바꾼 김형오”기사를 보면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 후반기부터 ‘직권상정은 국회의장의 의무’라며 압력의 수위를 높였고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도 김 의장을 만나 직권상정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3월 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원래 120일, 4개월을 ‘한나라당이 날치기 처리를 하겠다’, ‘직권상정해서 다 처리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100일로 줄여서 양보를 했죠”라고 말했다.

결국 김형오 의장의 중재안을 듣고 홍준표 원내대표가 ‘6월 이후 국회법에 따라 처리’가 아닌 ‘6월 이후 표결처리로 명시해 달라’라고 했으나 문제는 ‘표결처리 명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본회의 직권상정’이 목표였고,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표결처리’만 약속한다고 해서 직권상정을 막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고 ‘표결처리’를 넘어서 4개월의 사회적 논의기구 운영에서 100일로 줄어든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짐작 가능하다.

▲ 2월 26일 조선일보 3면 기사
결국, 드러난 ‘홍준표 원내대표’ 뒤에는 한나라당 중진들, 그리고 그 속에 이상득 의원이 숨어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상득 의원은 문방위에서 고흥길 위원장의 미디어법안에 대한 직권상정 날치기 당시부터 큰 목소리를 행사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일보는 고흥길 문방위 위원장의 날치기 직권상정이 있던 다음날인 지난달 26일, “‘강하게 가자’ 형님의 한마디에…”라며 “기습 상정 막후엔 또 ‘이상득 파워’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렇듯 알게 모르게 압력을 행사했던 이상득 의원은 3·2합의문을 두고 “아쉬울 것 없다”고 평했다고 전해졌다.

김형오 국회의장,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상득 형님에 대한 평가는?

위 분들이 3·2합의문의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역할론과 평가는 전혀 다른 영역이란 사실이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이번 역할에 의해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원혜영 원내대표는 “의장의 판단이 주된 기준이었는데, (민주당은 수용하고 한나라당이 거부했다면) 한나라당을 야단치고,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어떻게 직권중재를 하느냐?’(라고 하는 것) 이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라고 했다. 이에 대한 김형오 의장은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은 “국회의장으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더욱 문제는 한번 한나라당에 끌려간 김형오 의장의 이후이다. 한나라당 내에서 ‘탄핵’ 이야기는 들어갔지만 오늘 3일자 조선일보에서는 벌써부터 “국회의장은 자리 걸고 국회의원에 대한 폭력 뿌리뽑으라”라는 요구들이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정세균 민주당 대표 역시 그 불신임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민주당 내에서 지도부 사퇴론이 불거지고 있다. 설사 사퇴하라는 요구가 없더라도 지난 12월 말과 1월 미디어법안에 대한 직권상정을 막음으로써 나름 스타반열에 올랐던 정세균 대표에게는 이번 3·2합의가 치명적인 이력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김형오 국회의장과 정세균 대표의 불신임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눈에 띄는 평가들은 당장 이뤄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입증된 셈이고, 이 때문에 당분간 형님의 독주체제는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나라당’ 내에서의 이야기다.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당내에서의 영향력만 구축하는 것이 이후 이들에게 어떤 영향으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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