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은 최소한의 ‘격조’가 없다. 한국노총을 앞세워 임금 삭감을 핵심으로 하는 ‘노사민정’이라는 이름의 사이비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데는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하지만 그 합의가 부도날 위험성 높은 취약한 ‘약속어음’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신입사원 초임을 평균 28% 일방적으로 삭감하는 정책을 사용자들이 들고 나왔다. 하지만 현 정권이 사용자들을 향해 강하게 유감을 표시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국민에게 희망을 말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준 것”이라고 극찬한 대통령도 꿀 먹은 벙어리다. 현 정권은 그렇게 ‘저항 없는 임금 삭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언론 분야에서 현 정권은 달랐다. 재벌과 ‘조중동’의 방송보도를 넘겨주는 언론관련 악법을 그냥 의회 안에서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항이 있다고 해도,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일이라고 얕잡아 봤다. 그러다 크게 한 방 맞았다. 언론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맞섰고, 여기에 국민의 60∼70%가 동조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이 내세운 일자리 창출과 언론산업 선진화는 사기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렇게 40여일이 지났다. 언론노조와 상식 있는 시민단체들은 사회적 기구를 통해 언론관련법 개정 논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현 정권은 이를 무시했다. 또 다시 언론악법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한때 ‘청와대가 당을 셰퍼드(개)로 취급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던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차기 법무장관으로 앉혀 주겠다’는 약속을 청와대로부터 받았는지, “2008년 5월 이후 좌파들에게 끌려가던 상황을 이번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돌변했다. 고흥길 의원은 헌정사의 한 장을 장식한 ‘날치기 옹알이 상정 미수 사건’까지 불사했다. 한나라당은 힘으로 ‘미수’가 아니라고 우겨댔고, “(청와대) 청부입법은 하지 않겠다”던 김형오 국회의장은 직권상정으로 몰고 갔다. 그렇게 펼쳐진 상황은 미수를 미수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 언론노조가 25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옆에서 언론관련법 저지를 위한 ‘언론노조 총파업 5차대회’를 열고 있다. ⓒ송선영
언론노조는 다시 파업으로 맞섰다. 첫 번째보다 더 강력한 파업이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직권 상정을 막기 위해 의회 안에서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절박함이 부족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압박과 ‘민주당이 양보해야 한다’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총재의 한 마디에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무너졌고, 막판에 한나라당에 투항에 가깝게 ‘굴신’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산하 사회적 논의기구에서 100일 협의한 뒤 표결처리’가 합의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왜일까? ‘저들만의 국회’로 만들 용기와 담력이 민주당엔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으로 필자에겐 비친다. 그러기엔 민주당은 여전히 가진 게 너무 많고, 재는 게 너무 많다. 근본적으론, 이전 정권에서 저지른 자신들의 과오와 실책에 대해 뼈를 깎는 성찰과 반성을 하고 있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다시 출발하자며 “폐족”(안희정) 운운하던 자들이 진정으로 폐족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다시 출발하자며 폐족을 결의한 정당의 모습이 저것은 아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합의안에 대해 언론노조는 “법안이 폐기될 때까지 파업 대오를 유지하겠다”(최상재 위원장)고 밝혔다. “6월 국회에서 표결처리 한다는 것은 법안 처리 시점을 조금 뒤로 연장한 것일 뿐”이라며 “사회적 합의기구 참여 여부에 대해선 추후판단 하겠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한나라당의 관심은 ‘사회적 논의’가 아니라 ‘표결처리’에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합의에 “이 정도면 그래도 70점은 된다”거나 “힘든 상황에서도 선방했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과정을 복기해볼 일이다. 1차 ‘언론장악 쿠데타’ 실패 뒤 한나라당은 자신의 언론관련법 내용에 대해 온갖 변명을 둘러댔다. ‘종합편성채널에 대해서만 소유규제를 완화시키자니 지상파방송과 형평성 문제가 발생해 지상파방송까지 재벌 대기업과 신문의 소유를 허용했다’(나경원 의원)는 얘기를 하는가 하면, ‘지상파방송에 대한 재벌 대기업과 신문의 소유 허용은 지역 지상파방송을 살리는 데 목적이 있다’(정병국)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개악안 내용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았다. 재벌 대기업의 지상파방송 소유를 금지하는 수정안만 내서 날치기 통과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청와대는 3월2일까지도 “일자리 창출과 미디어 산업 선진화를 위해 꼭 필요한 미디어 법안이 왜 여야 정쟁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과 함께.

투쟁과 교섭의 줄다리기는 노동조합의 숙명이다. 하지만 이번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의한 사회적 논의기구에 대해선 언론노조는 교섭의 당사자가 아닌 ‘파수꾼’으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 눈 부릅뜬 채 다시 거리로 달려갈 만반의 채비를 갖춘, '표결처리'에 혈안이 된 한나라당에 정권 퇴진의 사자후를 토해낼 수 있는, 최후의 비토 세력으로서.

* 이 글은 방송기술인연합회에서 발행하는 <방송기술저널> 3월3일치에 동시에 기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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