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쓰나미

미국에 이어 전 세계 금융계에 경제 쓰나미가 몰아닥치기 시작한 2008년. 그 양상이 어떤지를 매섭게 보여준 상징들 중 하나. B. 메이도프의 500억 달러 다단계 금융사기 사건(달러 당 1천원으로 계산할 때 50조원. 2008년 한국정부 예산 약 270조원. 한 사람이 국가예산의 20% 정도를 사기쳤다고 생각해보면 그 크기 짐작 가능.) 뒷사람한테 돈을 받아 앞사람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투자자들을 끌어 모으는 다단계 사기. 결국에는 터질 수밖에 없는 욕망의 폭탄.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사들부터 각종 사회봉사 단체와 공익재단, 학교, 해외의 기관이나 단체 등까지 피해자의 범위 또한 그 규모만큼이나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의문은 도대체 이런 천문학적인 규모의 사기가-이미 1992년, 1999년, 그리고 2005년도 등 세 차례에 걸쳐 메이도프 펀드에 대해 금융당국에 문제가 제기되었고 조사가 일정하게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어떻게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은 채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국 금융체계의 깊은 공백 한 가지, 즉 제대로 된 규제체제의 부재와 규제당국의 감독부재, 그에 따른 직무태만, 감독소홀이다.

1930년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은 투기적 금융행태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법과 규제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뉴딜 규체제계는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도래하고 그에 기초한 각종의 규제완화/철폐 입법이 이루어지면서 거의 전면적으로 해체되었다. 그 결과를 지금 모두가 경제 쓰나미를 통해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혁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 없는 탐욕을 제어하는 것이다. 자유시장이야 말로 공정한 거래 장치와 규칙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의미 있는 자유시장으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시장만능-신자유주의 지배 하에서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규제는 악으로, 정부는 악을 집행하는 집단 정도로 묘사되었다. 그 오만하고 무모한 경제학이 오늘날 세계를 위험상태로 이끌어온 책임자이고 여기에 원조격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M. 프리드만이다.

M. 프리드만

▲ M. 프리드만
M. 프리드만. 웬만큼 신문/방송을 접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프리드만. 알다시피 케인즈 학도에서 출발, 1960년대 이후 시장만능의 자유방임주의 경제체제를 설파해오면서 오늘날 보수주의의 이론적 틀을-특히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한껏 고양시킨 경제학자. 1912년생이니 살았으면 오늘날 97세가 되었을 그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다. 노벨 경제학상도 수상했고, 정책자문가로도 명성을 날렸으며, 자신의 지식을 결코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평이한 내용으로 어려운 경제이론을 설명, 대중을 설득하는 빼어난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시카고 대학 교수 프리드만.

프리드만은 시장만능주의자이다. 그의 탈규제 주장은 예를 들면 환경이나 식품에 대한 규제는 물론 규제기구 자체까지도 모두 철폐하자는 것과 같이 극단적이다. 그를 비판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경제학자로서의 프리드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경제정책 전문가로서의 프리드만이나 시장만능의 자본주의 이념을 최선의 진리인 것처럼 전파한 대중 전도자로서의 프리드만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보내고 있다. 실패로 끝난 그의 정책 처방, 극단적 주장이나, 외고집, 그리고 학자로서의 오류와 부정직함 등등의 문제에서 프리드만의 실체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만의 오류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프리드만은 통화정책, 즉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확대, 쉬운 말로 돈을 늘려 뿌리면 경제공황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방안을 내놓은 것은 케인즈의 논리, 즉 정부의 재정정책이 공황을 극복하는 더 나은 길이라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경제학자나 정책 전문가들은 프리드만의 방안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처방일 뿐 전체적으로는 틀린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프리드만의 아이디어는 잘못으로 드러났다. 그의 처방대로 1970년대 미국이 취한 통화정책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왜? 간단히 말해 경제위기나 공황을 돈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의 금융위기 사태에 미국 정부가 엄청난 돈을 은행에 쏟아 부었지만 제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프리드만이 아니라 케인즈가 옳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크루그만의 지적이다. 프리드만 스스로도 2003년 한 인터뷰에서 통화주의 정책에 더 이상 신뢰를 가지지 않는다고 실토한 바 있다.

한편 보수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프리드만의 규제해체 논리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첫째, 특정한 규제나 지원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정부의 개입은 잘못되거나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둘째, 정부의 개입은 정부에 대한 과잉기대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정치적 처방을 동원하려는 태도를 조장하고, 한편 기대만큼의 효과가 없을 때 정국의 불안정을 가져온다; 셋째, 정부의 개입은 통제와 권위의 중앙집중을 가져오면서 사회를 전체주의적 노예체제로 이끈다; 넷째, 정부의 개입은 사유재산의 침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 나아가 문명의 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실력과 명성을 갖춘 프리드만 같은 학자의 이야기는 보수주의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메시지이다. 말할 나위 없이 프리드만의 논리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균형부재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장과 정부는 프리드만이나 그의 아류들이 주장하듯 결코 상호배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보는 정부, 보수는 시장 이러한 이분법도 타기해야 할 단견이다. 또 탈규제나 규제해체가 모두 악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균형적 관점과 도덕적 비전의 문제이다.

도덕적 비전의 부재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프리드만이나 하이에크류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시장 경제’, ‘자유로운 사회’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부의 경제계획, 정부의 경제개입 같은 것이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로 가는 길-하이에크의 표현을 빌면 노예의 길-이라고 특히 강조했다. 그 때문에 자유시장 경제 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F.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같은 것이 미국을 노예의 길로 이끈다거나 전체주의 사회로 만든다는 주장은 피해망상적 과장(paranoia)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시장 만능-신자유주의가 사람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 사회를 ‘자본의 전체주의’(totalitarian capital)로 이끌었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자유시장 경제, 자유로운 사회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분배적 정의’, 또 ‘정의로운 사회’와 같은 사회통합을 위한 도덕적 비전이 반드시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이 생략됨으로써 프리드만/하이에크류의 자유방임적 시장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이 빠진 기계적 장치일 뿐 윤리적으로는 공허한 주장으로 떨어지고 만다.

말할 나위 없이 자유는 고귀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등의 원칙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평등의 원칙이라는 말에 저항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핵심은 사회의 평화로운 존속을 위한 공공적 정의의 원칙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역사학자 I. 벌린이 지적했듯이 ‘늑대의 자유, 즉 강자의 자유는 양의 죽음, 즉 약자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은 도덕적 인간을 만들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유로운 개인들과 그 개인행위의 집합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면서 최적의 사회적 결과가 이룩된다는 A. 스미스류의 믿음이야 말로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미처 감안하지 않은 순진한 사고의 소산이다. 오히려 규제되지 않는 자유시장, 절제되지 않은 자유주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물질주의적인, 그리고 타산적인 인간을 길러내면서 자본의 사악한 측면을 강화하는 경향을 갖게 마련이다. 수십억, 수백억 달러의 적자경영을 하고도, 수십, 수백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고도, 수백, 수천만 달러의 보너스를 당당하게 챙겨가는, 상식과 도덕이 파탄난 기업인들의 모습이 그것을 입증한다.

약탈국가

시장만능-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작금의 사회에서 나타난 정부/정치를 J. 갈브레이스(텍사스 대 경제학과 교수. <불확실성의 시대>와 같은 명저를 쓴 존 갈브레이스의 아들)는 ‘약탈국가(predator state)'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약탈(predation)이란 무엇인가? 약탈이란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기구를 조직적으로 오·남용하는 행위, 다른 말로 하면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공적 보호/규제장치를 훼손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약탈국가는 겉으로는 시장의 자유를 위해 규제를 철폐/최소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체된 규제, 약화된 규제의 틈새를 이용해 특정집단에 특혜를 부여하는, 즉 공공의 영역과 시장을 동시에 약탈하는 존재인 것이다.

약탈국가는 이처럼 특혜부여 체제이다. 약탈국가는 따라서 정경유착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 금전적 이익, 보상체계를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접수·운용한다. 이들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사회공동의 목표, 사회공동의 선이-즉 국민 전체의 이익-아니라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뛰는 ‘부자 도우미 조직’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쉽게 말하면 약탈국가는 정경유착 세력에게 가장 많은 돈과 권세와 자리를 보장해주는 과제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약탈정부는 이념적인 집단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인 집단이다.

절제되지 않은 자유주의는 약탈국가를 낳고, 약탈국가는 약탈사회를 낳으며, 이것이 제어되지 않을 때 끝내 야만적 무정부 상태가 도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J. 슘페터나 I. 크리스탈 같은 학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자유방임적 시장자본주의 체제가 오히려 자본주의의 더 큰 적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도덕적 비전이 생략된 자유방임적 시장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보수주의의 타락을 가져온 주범 중 하나이다. 그것은 끝내 자본의 전체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지금 모두에게 공황에 가까운 경제 쓰나미를 안겨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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