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온나라가 떠들썩하다. 여당이 마련한 미디어 관련 법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방송계의 판도 변화, 나아가 언론계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지금 텔레비전은 운명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심지어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기자들조차도 무엇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 모르고, 관심을 쏟지도 않는다. 텔레비전의 막강한 영향력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근심은 차츰 실망과 분노로 바뀌어간다. 며칠 전, 반민주적 미디어 관련 법안을 초고속으로 밀어붙이는 여당을 비판하기 위해 마련된 집회가 순식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텔레비전 방송사 노조를 향한 성토장으로 바뀌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텔레비전이 처한 잔인한 운명을 정말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치 칼로 베어낸 것 같은 그 처절한 찢김은 텔레비전이 맞닥뜨릴 미래를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텔레비전은 이미 직접 민주주의의 훌륭한 도구이기는커녕 권력에 의한 상징적 억압의 도구로 나날이 변질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텔레비전은 화면은 갈수록 지배 권력으로부터 ‘초대받은 손님들’이 ‘안전한’ 스튜디오에 앉아 스스로를 과시하는 일종의 “나르시스의 거울, 나르시시즘적인 노출의 장소”가 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에 접근하는 것은 무서운 검열을 반대급부로 갖는 것이라며 “그것은 자율성의 상실로서, 무엇보다도 주체에 강요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나날이 강화되는 정치적 개입과 통제 속에서 상당수 기자들은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형식의 ‘자기 검열’에 순응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텔레비전을 소유하는 광고주를 통해 가해지는 ‘경제적 구속’이다. 국가-기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언론 통제의 메커니즘 속에서 모든 질서의 검열이 작동해 텔레비전을 상징적 질서를 유지하는 무서운 기구로 만든다. 그 메커니즘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닌 보다 구조적인 차원의 상징적 폭력이 행사된다. 피와 섹스, 범죄와 비극 등 사건사고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선정적인 것과 구경거리를 추구하는 이런 형태의 ‘선별’을 저자는 ‘안경’의 은유로 설명한다. 기자들이 특별한 ‘안경’을 쓰고서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것이다. ‘속보’를 찾아야 한다는 무거운 중압감은 기자들끼리 서로 베끼는 악순환을 낳고, 종국에는 모두 똑같아진다. “다른 분야에서는 배타성의 추구가 창조성·독자성을 낳는데, 언론에서는 획일화와 평범함을 가져온다.” 연쇄살인범에 대해 방송들이 아무리 호들갑을 떨며 기사 경쟁을 한다 해도, 서로 다른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뉴스에서 새롭고 참신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제로는 별것 아닌 것을 대단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또 그것을 믿게 만들 수 있다는 텔레비전의 진정한 위력이 발휘된다. “이같은 강신술(降神術)의 힘이 동원(mobilisation)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예컨대, 용산 참사에 대한 부정적인 텔레비전 보도는 철거민의 폭력성과 전철련 배후설에 대한 반복적 노출과 비판을 통해 정치적·윤리적 반감을 조장한다.) 언론들 사이의 차별성을 찾을 수 없게 되면, 저자가 말한 대로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이런 ‘거울 게임’은 결국 정신적 유폐와 폐쇄의 무서운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돌고 도는 정보의 악순환 속에 작은 차이를 위해 절망적으로 싸우는 기자들의 목소리는 그냥 묻혀 버리고 만다.

▲ 피에르 부르디외
‘보여주면서 감추는’ 이 모든 것의 배경에 텔레비전의 ‘시청률’이 자리한다. 저자가 “겉으로는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처럼 보이는 텔레비전은 사실상 구속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래서 저자는 언론인 개개인의 강한 책임의식을 넘어서는 큰 밑그림, 즉 ‘구조’에 주목한다. 구조화된 사회 공간으로서 장(場, champ) 개념이 필요한 것은 어느 기자가 쓴 기사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 즉 그가 몸담고 있는 언론기관이 가진 특수권력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텔레비전이 보다 광범위한 수용자들에게 도달하려고 할수록 텔레비전의 ‘선별’ 작업은 균질화·통속화되고, ‘순응적’이고 ‘탈정치화’되어 가는 경향을 띤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 정신구조를 건드리는 일은 도외시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선호하는 사건사고는 정치공백화 현상을 만들고 사회적 삶을 탈정치화시키며, 일화나 소문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저자의 말대로 “텔레비전 뉴스는 정치적 영향이 없는 사건들에 한하여 주의를 끌면서 ‘교훈을 얻고자’ 이것들을 극화시키거나, 혹은 ‘사회 문제들’로 전환시킨다.” (연쇄살인범 강○○에 대한 텔레비전 보도는 이런 메커니즘을 꿰뚫어본 지배 권력의 ‘홍보지침’으로 훌륭하게 증명됐다.)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과 같은 외부의 힘에 종속되기 쉬운 저널리즘의 장은 시청률이라는 매개를 통해 경제라는 장에 구속되어, 그 자신이 구조적으로 다른 장들을 역으로 구속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텔레비전의 위력이다. 심지어 정론을 표방하는 신문에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텔레비전은 그래서 ‘가장 멋있는 조종 도구’가 되어, 이제 그 위력에 매혹된 신문과 기업이 쥐고 휘두를 수 있도록 지배 권력이 마련한 밥상 위에 매혹적인 먹을거리로 올라 있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민주주의의 미명으로 포장된 시청률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경쟁’이라는 말로 포장된 기업의 상업적 요구에 텔레비전을 넘겨주는 것은 저자가 앞서 진지하게 설명하고 비판한 저널리즘의 장을 현명하고 이성적인 집단 의견, 공중 이성의 민주적인 표현에서 점점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직접 민주주의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는 텔레비전이 상징적 억압의 도구로 전환되지 않도록 싸우라. 무언가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선택은 분명해진다.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의 저서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밀라이 학살과 그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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