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논의와 주장 중에 '양비론'이야 말로 폐기되어야 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양비론의 경우 비겁함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거나, 상황을 아전인수 격으로 유리하게 하기 위한 술책인 경우가 많다. 열에 아홉은 그렇다. 양비론은 가장 정치적인 태도의 다름 아니다. 같은 이유로 양시론도 그렇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결국 같은 현상을 전하는 다른 해석일 뿐이다.

▲ 2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쟁점법안 협상을 위해 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여의도통신
대립되는 두 주장을 시시비비 가림 없이 어떻게 양쪽 모두가 다 잘못되었다고,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다. 반대로 모두 옳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번 합의는 어떠한가? 의회주의의 승리인가? 절묘한 합의인가? 최악의 파국을 피한 불가피한 안착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사회적 합의라고 하는 엘도라도는 찾아질 것인가, 아니 과연 있긴 한 것일까? 벌써부터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 다른 합의서를 흔들고 있다. 한나라당은 100일만 참고 기다리면 ‘표결’ 처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있고, 민주당은 애매모호한 ‘사회적 합의 기구’를 전제했다며 자위하고 있다. 여정을 합의한 순간 이미 다른 길로 들어섰다.

교묘한 패배다. 잘 싸우던 민주당은 졌다. 애썼지만 결국 졌다가 아니라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놓고 어이없이 졌다. 민주당의 이번 합의는 앞으로 국회는 내용 여부 일체와는 상관없이, 타협과 합의를 미덕으로 하는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꾸려나가겠다는 ‘의회 낭만주의’ 외에 무엇도 아니다. 미디어법을 100일이나 유보했다는 실없는 소리를 해대기에는 우선 그 대가로 모든 것을 내준 것의 아둔함이 너무 막대하고, 그 유보의 시간과 내용 조차도 흐리멍텅 그 자체이다.

애당초 법안 처리를 하룻밤의 단판 승부로 결정하겠다는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의 게임에 발을 담근 것이 잘못이었다. 모든 상황 자체가 비상식, 몰합리, 반민주적이었다. 김형오 국회의장을 포함한 여야 대표 7인의 회동은 처음부터 한나라당이 그토록 강조하는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회로였고, 민주당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민주주의 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과잉 위임정치였다. 처음부터, 아닌 것은 아닌 것일 뿐이니, 만약 힘으로 아닌 것을 합의하여 그렇다고 잊으라면 차라리 의원을 않고 말겠다는 절개 정도는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변수가 귀를 팔랑이게 해도 동요 않고 꿈적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이번 합의안은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울린 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합의는 개별 법률들의 구체적 내용에 따른 갈음도 아니다. 더 시급한 것부터 처리한다는 우선순위의 원칙도 아니다. 오로지, 국회의 파행만은 막아보자는 내부 논리뿐이다. 조중동이 부추겼던 그릇된 법치 실현의 강박뿐이고, 한나라당이 읊조리던 ‘나라 꼴이 어찌되건 경제를 살려야…’에 동조한 것뿐이다. 막판 모든 것을 내던진 민주당의 태도는 눈에 보이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 질서를 부정한 행위이다.

민주당에게 묻는다. 이깟 합의를 하려고, 작년 12월부터 국회 본회의장에 자리를 깔고 버텼는가? 스스로에 자문해보라. 중요했던 것이 한 나절의 여론인지 한 백년의 구조인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오로지 여론의 관심을 덜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협상도 하기 전에 타협의 대상이 되어버린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와 금산분리 완화는 차치하자. 100일의 시간을 벌어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장담컨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새벽까지도 재벌의 지상파 진입은 막는다는 박희태 대표의 말을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무조건 직권상정으로 바꾸는 것이 한나라당의 벼랑 끝 전술이고 배포였다. 그 엄포가 무서워서 덜컥 해버릴 합의였다면, 차라리 그러라고 내버려뒀어야 한다. 사학법을 기억하는가? 한나라당은 끝내 사학법을 합의하지 않았고, 민주당이 겨우겨우 통과시킨 법마저 힘의 역관계가 바뀌자 곧장 뒤집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법을 출렁이게 하는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이렇듯 논쟁적 개정안의 경우 더더욱 절대불멸의 무엇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길 수 없었다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어떤 과정을 남겨 놓느냐였다.

근데 거기서 일말의 양보라는 걸 해버리는 순간 그 너머의 모든 것들을 영영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나마 제출됐던 재벌의 종편, 보도종합채널 진출도 이제 담보할 수 없이 원점이다. 결정적으로 조중동이 방송에 진출하는 길을 합의라는 야만적 절차로 열어주게 될 것이 뻔하다.

거꾸로 매달리더라도 100일만 보내면 되는 한나라당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너무나 간단하다. 재벌이 방송에 진출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일자리가 창출되는가? 재벌은 방송으로 나와야 한다. 조중동이 방송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여론의 다원성이 확보되겠는가? 조중동도 방송으로 나와야 한다. 이러고 버티면 재간이 없다. 몸짓이 어른보다 큰 어린아이가 죽겠다고 부리는 생떼를 단시간에 무슨 수로 제압하겠는가? 엉큼한 속내를 위장한 사이비 선교사 거짓말을 어떻게 100일 안에 입증해 낼 수 있냐 말이다. 미디어법은 경제 살리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에 목을 거는 이유는 조중동의 사업 확장이 한나라당의 지상과제이기 때문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이미 합의라는 덫에, 100일 이라는 그물에 걸려있어 무능한 진영 논리 이상의 위상을 확보할 수 없을 공산이 크다.

우리 사회의 발전 단계와 수준이 그러한 것이었다면, 국회가 있으나 마나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야당의 의석수로는 불가항력이었다면 그 사회 진화의 운명에 따라야 했다. 막을 건 미디어법만이 아니었고, 나쁜 건 100일이 지나도 나쁜 것이란 말이다.

모든 악은 본질적으로 같다. 경우에 따른 악이 있을 수 없고, 합의에 따라 악이 선이 될 수도 없다. 타협과 합의는 결코 차선이 아니다. 물론, 최선은 국회가 악법 따위가 아닌 민생과 복지를 위해 복무하는 것 일 테다. 차선은 국회가 생산적 활동을 하지 못하되 작당모의적 합의에 따른 악법은 만들지 않고 그나마 정체된 공간으로 남는 것이었다. 몇 개를 제외한 악법이 전부 통과될 오늘이 바로 최악이다. 그리고 악법의 일부가 합의 통과될 100일 후가 차악이다. 한나라당이 최악을 아무런 부담없이 처리하고 약간의 진통을 참으며 차악을 기다리게 될 100일 동안 힘들게 차선을 지켜오던 민주당은 어쩔 수 없이 차악의 주범이 될 것이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합의를 때려 쳐라. 그리곤 계속 막아라! 합의하는 순간 한나라당도 한나라당이지만, 민주당도 민주당이 되고 만다. 어느 역사도 삼전도의 굴욕을 삼전도의 합의라고 기술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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