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금요일, 오후 3시30분.

손전화를 끄놓고 있다가, 다시 켠 시간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통의 문자와 전화를 받아야 하는 직업인지라, 다른 일을 할 땐 전화를 꺼 놓곤 합니다. 입력해 놓은 전화번호는 이름이 뜨기 때문에, 다시 전화를 드리지만, 모르는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거나 뜨면, 안 받기 일쑤입니다. 일일이 다 전화를 받으면, 솔직히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거든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 날도 2시간 가량, 전화를 꺼 놓았다가 켰더니… 따따따… 17통의 전화와 문자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때 지나가면서 보이는 문자메시지.

‘CBS파업출정식 오후 5시.’

지금은 언론노조 중앙사무처에 파견나와 있는, 예전에 CBS 대표시사프로그램인 ‘시사자키’ 담당이었던 이진성 PD가 보낸 문자였습니다. KBS스튜디오에서 공영방송법과 관련, 저쪽의 논객과 피곤한 토론을 녹화하고 나오면서, 정말 피곤한 2시간을 보내고 나오면서, 받은 문자메시지. 그것은 한 마디로,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밭에 한바탕 쏟아붓는 소나기를 만난 농부의 심정이 이럴 것 같아… 하는 심정이었고, 기쁨이었고, 환희였습니다.

괜시리 마음이 급해지더군요. 택시를 잡아 타고, 목동 CBS요 하고 달렸습니다. 55년의 역사,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뉴스를 하지 못하는 지상파였던 CBS, 한국최초의 방송사이자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수많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견뎌온 CBS의 저력, 300일에 가까운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던 수 년 전의 CBS… 주마등처럼 CBS의, 고난의 역사가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 CBS 노조 홈페이지 캡처.
10분이 어찌나 늦게 가던지, 일찍 도착해서 5시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느렸습니다. CBS 양승관 노조위원장 왈, “저는 부분파업쯤으로 가려고 했는데, 조합원들이 전면파업을 하자며 얼마나 집행부를 나무라든지요…” 은근히 자랑하는 양승관 위원장의 얼굴에, 징계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고, 징계가 뻔한, 출범한 지 불과 1주일 밖에 되지 않는 CBS노조의 신임집행부 수장의 표정은, 자랑 그 자체였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전체 조합원 240명의 라디오방송사, 서울의 100여명의 조합원 중 100명 가량의 조합원들이, 오후 3시 전면제작거부 돌입, 오후 5시 파업출정식 결합….

오전에 MBC 수석부위원장이 느닷없이 전화해서, 이번에도 우리만 파업해서 고립되는 것 아닌가… 하며 걱정하는 목소리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데, MBC에 이어 CBS가 파업의 깃발을 들어주니, 그것도 서울의 거의 모든 조합원들이 파업출정식을 하니… 기도로 시작하는 파업출정식이 생경했으나, 그 기도가 얼마나 거룩하게 느껴지든지….

현 정권과 한나라당이 한국을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기 위해, 언론관련 악법을 무리하게 치고 든 상황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CBS노조의 ‘전면제작거부 및 전면 파업선언’은, 악의 구렁텅이로 전락할 뻔한 ‘소돔과 고모라’를 100여명의 의인들이 되살리는 의로운 투쟁선언이었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가 광야를 불사르듯, CBS 240명의 노동조합이 SBS, EBS, YTN, 아리랑국제방송 등이 전면제작거부를 선언하고, 3월2일 월요일, 파업투쟁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을 끌어내는 작은 촛불이 된 것입니다. 그 작은 촛불이 언론계 방송계라는 들판을 불사르는, 도화선이 된 겁니다.

1시간에 걸친 파업출정식은 용솟음치는 환희였고, 감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방송사 노동자들의 절절한 외침이었고 분노였으며, 또 하나의 희망이었습니다.

3월2일 월요일, 오후 1시 여의도 국회 앞에서, MBC CBS SBS EBS YTN 아리랑국제방송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신문과 방송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크게, 한나라당의 언론악법 저지투쟁의 깃발을 펄럭일 겁니다. 많은 시민들도, 토요일 서울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된 MB악법 저지 집회에 밝힙니다. 휴가내고 동참할 거라고요.

한국 민주주의,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한국 민주주의의 반동시대에 진보의 함성이 기대됩니다. 함께 눈과 귀로, 그리고 온몸으로 절망을 떨쳐내고 일어선 언론노동자들의 힘찬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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