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불교성지탐방 기획기사 <쿠시나라가> 편을 보았다. 구석구석 사진과 함께 소개된 그 기사를 정겹고 반갑게 보았다. 모두 낯익은 곳이었기에…….
5년 전 쯤인가 나 역시 불교성지탐방 취재차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불심(佛心) 깊은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성지순례, 며칠을 공부했는지 발길 옮기는 곳마다 가이드가 설명을 마치기 무섭게 “아! 맞아” “오! 그래” “아 그 얘기가 바로 이것이었구먼” “거기가 여기야?”와 같은 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나야 불교에 대한 지식도 짧고 녹음기 들고 취재하기 바빠서 그분들처럼 감동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어느 장소에선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고 말했던 <바이샬리> 유마거사의 집터에서 유마거사처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보살자비심의 극치. 더러 몇 분은 눈물을 흘렸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 방송중인 김사은 PD
감히 견줄 것은 아니나, 요즘은 무척이나 유마거사의 그 말이 명치 끝에 남아서 아프게 한다. 칠순의 노모가 허망하게 주저앉아 골절로 입원하시는 바람에 병 수발을 하랴 집안 일 하랴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머님 말씀대로 ‘눈에 보이는 병이기 망정이지 더 큰 일 당했더라면 어찌할 것이냐’는 가정에도 미리 가슴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한 번 심신이 약해지니 사소한 일에도 자주 마음이 상한다. 정신이 병들면 육신도 병드는 법인가, 육신이 지치니 정신이 쇠약해진다. 무장해제 당한 이 틈을 타 공략해오는 경계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고작 모친 입원 한 달에 이렇게 쉬 생활 패턴이 망가질 수 있단 말인가. 나약한 자신을 책망하느라 또 한번 자학. 환우(患憂)에 시달리는 사람과 그 가족이 남 일 같지 않다. 몇 년 째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친구, 졸지에 큰 수술을 한 은사님, 성격차로 이혼 수속중인 후배, 사업이 어려워 하루 하루 연명하고 있는 선배, 어머니는 암으로,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잃고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먼 친적 조카…… 그 사람들 이름 하나씩 부르다보면 금세 눈물이 핑돈다. 나는 나의 작은 불행 앞에 강펀치 맞고 정신 못차리는데 일찍이 큰 고통 겪어온 이 사람들은 왜 이리도 의연하고 운명 앞에 담담할 수 있는지, 또 마음이 저려왔다. 그들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 청취자의 사연이 들어오는 문자게시판
청취자들의 사연에 그들과 함께 웃고 울 때가 있다. 때 빼고 광내고 왁스칠까지 했는데 이튿날 비와서 허망하다는 A씨의 사연은 그래도 웃을 수 있다. ‘할머니가 보따리를 놓고 내려서 그것 찾아드리느라 5분 늦게 출발했는데 그로인해 벌금 만원 물게 되었다’는 시내버스 기사 B씨의 사연에 가슴이 아프다. 왜 착한 일 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지, 승객의 보따리를 찾아드리느라 늦었으니 상금으로 만원을 줄 수는 없는 것인가? 나이 마흔에 어렵게 귀한 인연 만나 결혼했는데 아 글쎄 결혼 6개월 만에 신부가 멀리 경기도 성남으로 발령이 났다며 속상해하는 C씨의 사연도 애틋하다. 매일 알콩달콩 살아도 미리 만나지 못한 세월을 보상받지 못할 터인데 사랑스런 신부가 얼마나 그리울까.
동료의 모함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D씨, 내가 모함당한 것처럼 속상하고 분하다. 그를 위로할 수 없어 안타깝다. 지하 90미터 굴을 파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E씨와 그 그룹들의 사연도 매일 매일의 공정을 이해할 만큼 상세하다.
아내 생일을 축하하는 F씨의 인터넷 사연은 제법 평범했다. 살림이 여유롭지 못해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7년을 살았다. 최근 아내가 둘째를 출산했고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내가 애처롭다. 뭐 여기까지는 그냥 담담하게 소개했는데 남편이 뒤에 이렇게 써놓은 것이었다.

여보, 우리 잘 살아보자고요~
나는 이런 힘든 배경을 발판삼아 더욱 더 노력할 것이고
언젠가는 노력의 결실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여보 난 아무리 힘들어도 첫째 00이가 있어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이제 막 태어난 △△이가 있어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있어 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내 수첩에 우리 가족 사진보면 다시 한번 파이팅!

세상의 모든 아버지께 바칩니다.
오늘 하루도 가족을 생각하며 삶의 전쟁터에서 성공하길 빕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연 속에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는 순박하고 정 깊은 한 남자가 꼭꼭 숨어 있었다. 인터넷 저편의 그 남자의 마음을 읽은 순간 왈칵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내가 울먹거린 것처럼, 남편도 울먹였으리라. 내가 눈물을 참은 것처럼 아내도 고마움에 몸을 떨며 눈물을 참느라 어깨를 살짝 들썩거렸을 것이다. 그들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 그들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단지 애청자라는 이유로 같이 아프고 같이 슬프다.

지역 방송은 아무래도 지역적 친밀성이 가장 큰 특성인 것 같다. 누군가 방송을 들으면 대여섯명의 그룹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청한다. 그들에게는 방송이 곧 놀이터가 된다. 서로 이름이나 별명을 부르며 출석체크하고 전화나 문자로 할 얘기도 방송문자로 보낸다. 그래서 (주로 끝번호로 통하지만) 누가 어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서 지금 어떤 상황인지 MC를 비롯한 청취자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익명의 청취자들끼리는 어떻게 연계가 되는지 곧 친구가 되고 또 다른 커뮤니티를 조성한다. 우리 방송에서는 방점까지도 소개하려고 한다. 청취자들도 그 점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진행을 하다보니 신기하게도 청취자들과 교감하고 있는 느낌이다. 모니터 저편에서 누가 웃고 우는지 가슴이 먼저 안다. 그들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 그들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