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박3일 동안 군산, 목포, 통영·고성, 거제, 부산, 울산에 있는 조선소를 찾아다녔다. 최대한 하청, 물량팀 노동자들을 만났다. 정규직 노조 위원장을 만나 ‘왜 국회의원 만날 때 하청은 참가시키지 않느냐’고 쓴소리를 많이 했다. 물량팀 포함 13만명은 언제 얼마나 잘릴지 모르는데 이들의 목소리는 잘 대변되지 않는다. 하청을 어떻게 할 것이냐. 나가도록 놔둘 것이냐. 이들은 (2009년 이후) 체념에 익숙해져 있다. 예전에는 나가도 빅3(현대, 대우조선, 삼성)가 있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이 1일 <조선소 위기와 비정규직 대량해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한 이야기다. 기업-정부-금융권이 강력하게 추진 중인 조선산업 구조조정을 이야기할 때 ‘투명인간’처럼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13만~14만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다. 이들은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소조선소를 떠나 이른바 조선 빅3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1년여 동안 최소 1만5천명에서 2만5천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소리도 소문도 없이’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산업 공식 통계와 허민영 경성대 교수(경제금융물류학부) 분석을 종합하면, 2000년 조선산업 노동자는 7만9776명(직영 5만3816명+하청 2만5960명)이었으나, 2014년에는 총 20만4996(직영 7만152명+하청 13만4844명)으로 약 2.5배 수준으로 늘었다. 직영은 1만7천명 늘어나는 동안 하청은 11만명 가까이 늘었다. 특히 2007~2008년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아 사라진 중소조선소의 노동자들은 빅3의 하청노동자로 들어갔다. 조선산업의 하청노동자는 2007년 8만139명에서 2014년 13만4844명으로 급증했다.

▲허민영 교수 (사진=미디어스)

금융위기 이후 조선사들의 수주 전망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빅3가 하청노동자들을 늘린 이유는 ‘해양플랜트’ 때문이다. 고유가로 시추선 같은 해양플랜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 이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허민영 교수는 “특히 해양플랜트는 초대형 구조물 중심이라 상선 건조에 비해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사들의 기대와 달리 ‘저유가’ 기조가 계속됐고, 지난해부터 하청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해고됐다. 허민영 교수는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2014년 말부터 일자리를 잃은 하청노동자는 1만5천명에서 2만5천명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하창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장은 “현대중공업에서는 2014년 15개, 2015년 57개의 하청업체가 폐업했지만 신규업체가 등록해 전체 하청업체 수는 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인원은 4721명이 감소했다. 업체폐업을 통해 구조적인 정리해고와 임금수탈이 진행 중”이라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김태정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해양플랜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2015년부터 공장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울산에서 8천명, 거제에서 6천명, 목포에서 4천명 이상의 하청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전했다.

‘거제통영고성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원회’의 이김춘택씨는 “정부와 채권단이 연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이야기하고, 언론은 그에 부응해 구조조정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며 “채권단의 압박에 원청 조선소는 모든 부실과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고 우선적으로 다단계착취의 계단 가장 아래 위치한 하청노동자들에게 고통이 집중되고 있다. 업체폐업, 임금체불, 임금삭감, 블랙리스트에 심지어는 하청노동자와 하청업체 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1일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조선산업 구조조정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천주교 불교 기독교 등 종교계 3대 종단이 기획했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한국기독교협의회인권센터, 천주교서울교구노동사목위원회가 주관했다.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정부와 은행, 해당 기업들이 경영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안전망과 고용안전망을 구축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을 줄 세우며 정리하고 있다. 조선산업 구조조정의 핵심은 ‘노동몫 줄이기’다. 이를 두고 허민영 교수는 “이번 구조조정은 차제에 노동개악을 준비하는 정부와 이번 기회에 역삼각형 구조와 내부 부실을 털어버리겠다는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라며 “전형적인 ‘이윤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 방식의 구조조정이다”라고 지적했다.

14만이라는 숫자와 과거와 다르게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이기 때문에 이번에 추진 중인 조선산업 구조조정의 결과는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때보다 심각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김태정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쌍용차, 한진중공업 때 한국사회는 들썩였지만, 지금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조직돼 있지도 않고, 조직될 가능성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하루아침에 수만명이 잘리는데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비참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빅3조차 당장 내년 일감을 확보하지 못했을 정도로 조선산업은 불황이긴 하지만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빅3는 일자리를 유지할 능력이 충분하다. 특히 해양플랜트부문의 적자가 전체 적자의 80~90%를 차지하는 만큼 사업을 조정하고, 수십여개의 계열회사를 상장해 현금을 마련하고, 현금성 자산과 사내유보금 등을 활용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의 공적 지원을 받으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조선소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토론회 모습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허민영 교수는 국가경제와 지역경제의 ‘전략산업’인 조선산업에서 숙련노동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고, 일자리 문제는 ‘사회적 재난’이라는 점에서 정부가 이른바 ‘조선도시들’을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하고 제도적‧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에서 지방자치단체가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해고노동자들의 임금을 일정 부분 보장하고 직업프로그램을 운용한 것처럼 한국도 이 같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기업이 주주에게 배당을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부나 지자체가 구조조정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상시적으로 고용안정기금 같은 것들을 징수해 활용하는 것도 사회안전망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조선산업 구조조정과 하청노동자의 일자리 문제다. 결국 사회적 연대로 여론으로 기업과 정부를 압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태정 정책국장은 “조선소 정규직 노조는 파업을 제대로 못했다. 부끄럽지만 이게 현실이다. 그래도 대중의 역동성을 믿고 작은 싸움이라도 만들어나가려고 한다.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창민 지회장은 “현장에서 싸움이 격렬하게 일어나야만이 희망버스와 같은 분위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인 정수용 신부는 “대량 정리해고를 통한 구조조정이 과연 어떠한 이득이 있는지,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를 대규모로 해고하는 것이 유일한 정답인지에 답하기 위해 우리 사회도 이제는 충분한 경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며 “최근 우려되는 조선업의 위기에 다양한 해결방법이 논의되고 있지만, 과거 우리 사회가 심각한 진통을 겪었던 대량해고로 다시 이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노동자를 대규모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해고하며 가장 약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 얼마나 큰 아픔을 가져오는지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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