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합니다.
대통령께 편지를 써본 적이 있어야지요. 아참, 딱 한 번 있군요. <한겨레21> 기자 시절, 국세청의 국회 로비에 관한 기사를 쓴 뒤 후속조처가 한심해서 노무현 대통령께 지면을 통해 편지를 쓴 적이 있지요. 그 때도 답장을 받은 기억은 없어 이번에도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히 쓰지요.

사실 겁이 좀 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가도, ‘말해 무엇 하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럴 때는 요새 유행하는 말로 “생각대로” 써 내려가는 게 상책인데, 그러려니 머릿속 검열장치가 가로막습니다. 국가원수 모독죄? 유언비어 유포죄? 그런 법은 사라진 걸로 아는데 세상이 자꾸만 거꾸로 가니까요. 제가 편지글을 띄우는 공간이 인터넷이니 어쩌면 미네르바를 잡아간 전기통신기본법에 저촉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요새는 대학 졸업 이후 처음으로 제 양심과 정의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시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원고 이명박’과 다투는 신문사의 노조위원장

제 소개가 너무 늦었군요. 저는 1996년부터 11년 남짓 <한겨레>와 <한겨레21> 기자였고, 지금은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신문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한겨레신문사 노조위원장입니다. 맞습니다. 문제의 그 신문사지요. 대통령께서 서울시장 재직 시절 다른 신문에 비해 비판적인 기사가 많이 실리자, 대놓고 “그 신문 몇 명이나 보나?”했다던 그 신문, 그리고 대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 검증 과정에서부터 쟁점으로 부각됐던 ‘BBK 의혹’을 남들보다 열심히 취재하고 보도했다는 이유로 아직도 ‘원고 이명박’과 다투고 있는 그 신문 말입니다.
오늘은 제가 속한 신문사에 대한 편견은 접으시고, 한 사람의 언론인, 언론노동자의 이야기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저는 여의도에 갑니다. 오후 3시에 전국의 언론노동자가 모이기로 했습니다. 대통령의 표현으로는 경제 살리기 혹은 일자리 창출 법안이라는, 제 문법대로라면 국민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틀어막는 반민주악법인 언론 관련법이 국회에 상정되거나 어쩌면 날치기 통과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지난 연말연초에 비하면 봄날 같아서 부담이 덜 합니다만,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언론을 제 입맛대로 지지고 볶아서 끝이 좋았던 권력자가 있었습니까? 일단 상정해놓고 논의하는 게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한다고요? 말은 그럴싸합니다만, 그 다음엔 충분히 토론했으니 표결하자고 할 거 아닙니까.
언론노조와 언론 관련 시민사회단체가 얼마 전 대통령께 이 사안을 가지고 원탁대화를 해보자고 제의했지요. 신문과 방송이 생중계하는 자리에서 토론해 보자는데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고 한번 잘못 결정한 뒤에는 되돌리기 힘든 사안이므로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학계·시민단체·언론노동자·발행인·사장·시청자·독자 모두 모여 여론 다양성 보장과 미디어 산업 진흥에 관해 논의해보자고 했는데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라면서 소모적인 다툼으로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저희가 억지 부리는 게 아닙니다. 미국·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언론 관련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충분히 토론하고 이견을 최소화한 뒤에 입법화했습니다. 현재의 방송법을 만들 때 김대중 대통령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 방식이 대통령께서 좋아하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다가가는 것 아닌가요.

언론은 ‘개국공신’의 봉토 될 수 없어

대통령 말씀대로 그렇게 지고지순한 가치를 위해 신문법·방송법을 고치자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겠습니까. 대통령께서 진정성을 보이고 싶었다면, 정치 멘토로 불렸던 최측근을 방송통신위원장을 시키지 말았어야죠. 대선 때 언론특보(이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격사유지요)를 맡았던 사람들이 아무리 적임자라 하더라도 공정성과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사의 사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막으셨어야지요. 방송 때문에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졌다고 말했던 정치인이 이번 국면에 앞장서지 못하게 하셨어야죠.
제가 추정컨대 대통령의 속마음은 이럴 겁니다.
‘내 통치 철학(그런 게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국정운영 방향(일관성은 있어 보입니다)을 잘 숙지하고 잘 전달하는 언론들만 남겨서 국민들이 일치단결, 일로매진해 모두가 최고가 되고 모두가 성공하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국민들도 내가 생각하는대로 생각하고, 어두운 곳 대신 밝은 곳만 보면서 좀 긍정적으로 살면 안 되나. 용산의 경우도 법을 집행하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뭐 대단한 일이라고. 언론이 조금만 도와주면 될 텐데. 판을 한번 흔들어볼까. 신문은 가만두면 서서히 말라 죽을 테니, ‘개국공신’ 조중동 정도만 재벌들하고 하나씩 짝을 지워서 기존 방송사를 주거나 종합편성채널을 하나씩 만들어 선물해주면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먹고 사는 데에 지장 없겠지. 보수들의 안정적인 영구 집권 기반까지 만든 셈이니 영원히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시작부터 꼬이니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혹시나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빨리 맘을 고쳐 잡수세요. 단언컨대 그렇게 안 될 겁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꼬인 문제를 푸세요. 1월에 못했으니 2월엔 통과시킨다, 2월에 안되면 3월에는 반드시 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적어도 내 임기 중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제의한다면 저부터 그 손을 덥석 잡을 겁니다.

대통령께서 신문에도 관심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신문산업은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문 닫을 곳이 적지 않습니다. 시대의 변화나 독자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서 그런 측면도 있을 겁니다. ‘자전거신문’ ‘비데일보’가 돈을 주고 독자를 사는 과열경쟁을 벌이면서 신문시장을 혼탁하게 만든 측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콘텐츠가 인터넷에서 헐값에 유통되는 현실, 신문이 만들어져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의 비용이 구독료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그래서 광고 의존도, 특히 대기업의 광고의존도가 높아져 자본권력에 대한 감시·비판 기능이 떨어지는 현실, 지속적인 독자 감소로 독자적인 유통망을 유지하기에 버거워졌음에도 아등바등 버티는 현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신문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개별 신문사 차원의 혁신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구조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사회적 논의기구가 만들어지면 신문산업의 노·사·정이, 그리고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독자·유통업자 등이 모여 신문산업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제 전공 분야는 아닙니다만, 방송이나 통신 영역도 정치권력이 제 입맛대로 재편하려는, 되지도 않을 욕심만 버린다면, 교통정리를 할 부분, 책임성을 높일 부분과 규제를 풀 부분, 지원과 진흥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우리, 머리 맞대고 풀어보자구요. 설령 대통령의 임기 중에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후대는 ‘이명박 대통령이 언론미디어 산업 분야의 큰 물줄기를 잡았다’고 평가를 할 겁니다. 올 가을이면 저는 임기를 마치고 현업으로 돌아갈 텐데, 대통령과 정부·여당 그리고 경찰들과 싸움만하다 끝날까봐 걱정이 됩니다.

프랑스가 18살되는 국민에게 1년치 신문쿠폰을 주는 이유

신문 관련해서 딱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프랑스는 만 18살이 되면 신문을 1년 동안 볼 수 있는 쿠폰을 주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러 지원제도 가운데 하나라고 하네요. 왜 그럴까요. 필요하면 돈 주고 사보면 되지 왜 쓸데없는 곳에 세금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신문의 잉크냄새, 손에 닿는 종이의 느낌, 정보를 접하고 곱씹는 적극적인 행위가 몸에 배면 책을 더 가까이하게 되고, 인문과 교양이 풍부한 사람들이 아름답고 넉넉한 세상을 만든다, 이런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신문산업에 대한 지원제도를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쿠페위원회, 그런 제안을 받아들인 사르코지나 프랑스 정치인들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겁니다.

편지지라면 죽어도 이렇게 쓰지는 못했을 텐데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성공하시길 빕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설마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느냐고 제가 주변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제 ‘설마’를 너무 많이 어기셨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내용적 민주주의를 갈망할 정도로 민도가 높아졌는데 설마 예전처럼 독재를 할 수 있을까, 산업구조가 바뀌고 자본시장도 국제화됐다는데 설마 관치경제를 할 수 있을까, 갖가지 이유로 북쪽 땅을 밟는 사람이 한 해에도 수만인데 설마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릴 수 있을까. 요새 같은 시절에 어떤 상태가 돼야 나라가 망했다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라가 망하는 일은 정말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통령의 임기와 관계없이 우리들은 질긴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대통령께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취임 1주년을 앞두고 각 언론사들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통령 이명박’의 성적표는 참담합니다(대통령께서 사장을 갈아 치운 한 방송사만 엉뚱한 결과가 나왔더군요). 대통령의 대표 상품이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외교·남북관계·문화·교육·언론·국민통합 등 온갖 분야에서 ‘양’ 아니면 ‘가’입니다. 그래도 지난해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에 비하면 지지율이 올랐다는 점을 위안 삼으시렵니까.
적어도 언론악법 날치기 처리를 포기하고, 제안드린대로 ‘언론다양성 보장과 미디어산업 발전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를 가동하신다면 적어도 언론과 국민통합 분야에서는 ‘미’ 이상으로 성적이 올라갈 겁니다. 대화와 타협을 존중하는 자세로 다른 분야에 임하신다면 마찬가지로 상승하면서 시너지효과까지 보태질 겁니다. 그래서 저와 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언제가 기자와 취재원으로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가 얘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때 괜히 헛힘 썼다고 얼굴 붉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잡문을 닫습니다. 설마하면서도 제 연락처를 남깁니다. bhkim@hani.co.kr. 답장 주시면 저도 얼른 다시 편지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2009년 2월25일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신문지부 지부장 김보협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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