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의 기본철학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보수주의는 급격한 변화를 제어하면서 기존의 정치체제와 사회질서를 유지/강화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로 정의된다. 즉 보수주의는 진보/개혁의 이념이나 그에 기반한 변혁운동과 달리, 미래의 기획이 아니라 과거 그리고/또는 현재의 유지·확대를 위한 정치적 기획을 핵심동력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생산·유포되는 철학/사고/가치, 지성의 내용과 결과물 등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용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고, 또 그 깊이와 넓이에서 상대적으로 좁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결정적 취약점이다.

신중함과 절제의 철학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왜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이 근본적으로 회의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정치적 조직체(예: 정당, 의회, 정부 등)가 이룩할 수 있는 것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상을 실제의 정치적 기획으로 변환시키기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의 기획, 즉 혁명을 원천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보수주의자들은 법과 이성 같은 것을 넘는 종교와 도덕, 윤리 같은, 사회와 개인을 지배하는 초월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것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극히 중요한 요체라고 간주한다.

이처럼 보수주의는 인간에 대해 성악설에 가까운 비관적 관점을-이것을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 따위로 해석하고 그에 바탕해서 각종 경제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은 절제와 신중함, 인간과 사회에 대한 겸허한 태도 등을 중요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야 사회가 저열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협의와 타협, 질서에의 순응과 같은 원칙에 기초한 ‘한계의 정치’(limited style of politics)를 추진할 때 가장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보수주의 철학의 원조라는 칭호를 받는 E.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과거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덕목을-그 덕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강제로 적용하려는 급진적 시도가 결국 프랑스의 공포와 파괴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보수주의의 미덕

이데올로기에 미덕이 있는가? 정치적 도그마 정도의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미덕을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기획의 뜻만을 품고 있지는 않다. 이데올로기의 기본은 정치적 강령을 넘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 세계관 같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인간적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에 이데올로기의 미덕이 존재한다.

진보적 사회변혁을 주창하는 이념의 미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역량에 대한 믿음과 타인에 대한 신뢰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과학, 그리고 합리적 판단능력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라고 간주했다. 18세기 계몽사상과 유럽을 휩쓴 혁명이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의 진보/개혁적 이데올로기의 본원적 출발점은 ‘주체적 판단능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발견한 데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세울 수 있는 혁명적 기획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며, 타인에 대한 신뢰, 공동체를 위한 연대 같은 것도 모두 이러한 인간의 영웅적 가능성, 즉 내가 그렇다면 너 또한 그렇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진보의 철학적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완결성을 믿고 그것의 실천을 향해 모두가 함께 무거운 역사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 즉 유토피아에 대한 질긴 열망은 바로 이같은 인간관, 세계관에서 시작되며 바로 거기에 진보의 미덕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전통적 의미의 보수주의가 가진 미덕은 무엇일까? 앞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겸허함과 신중함이다. 예를 들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는, 또 사유재산권이나 기업의 행위에서 무제한적인 자유방임을 주장하지 않는, 또 재산은 축적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용과 베풂과 같은 인간적 덕목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을 강조하는 본래적 보수주의의 뜻은 그러한 인간관,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보수의 미덕이 존재한다. 현대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킨 문화적, 사회적, 정신적 재앙-소비주의, 물신주의, 이기주의, 저급한 대중문화 등-에 대해 가장 강력한 비판을 가하는 집단 중 하나가 오히려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미덕은 현실의 마당에서 배반당하기 일쑤이다. 정치운동의 이데올로그들이 자주 드러내 보이는 생활과 이념의 이중적 행태는 미덕은커녕,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 또 이데올로기가 극악한 폭력의 도구로 전환되는 것 역시 인간의 역사에서 흔히 목격되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가 본래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가면을 쓴 도그마라는 부정적 의미를 풍기는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된다.

타락한 사이비 보수주의자들

타락한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 본래의 가치와 덕목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나약한 사람들’, ‘권위 없는 약자들’이라고 조소했다. 그럼 본래적 의미의 보수주의를 모르는 채 자신을 보수주의자라 생각하는 타락한 자들, 깊은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일을 밀어붙이는 자들, 그리고 그것을 리더십이라고 착각하는 자들, 인간에 대한 예의와 겸손함을 망각한 자들, 부유층과 특정기업에 온갖 특혜를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들, 그리고 이들이 권력과 부를 편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법과 논리와 여론과 공권력을 동원해 보호막을 자청하는 자들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보수를 모욕하는 이들 사이비들은 점잖게 말해 극우, 정확히 말해 ‘꼴통’이다.

보수주의 집단이 미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으로 등극한 때는 1980년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 시점이다. 이후 이들 보수집단은 공화당 정치의 토대가 되면서 공화당을 좌우하는, 그리고 미국 사회 전체를 좌우하는 권력집단이 되었다. 비록 2008년의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퇴함으로써 잠시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보수주의는 이미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담론을 좌우하는 거대 패러다임으로 성장한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그 파장은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그리고 네오콘-신보수주의-미국패권주의의 이름으로 미국뿐 아니라 지구적 범위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주의가 꼴통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이 두 가지 극단주의 이데올로기와 그 추종자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쥘 수 있게끔 대중운동적 차원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우익 기독교 집단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극단의 길을 갈 때 사이비로 전락한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은 극단주의적 사고와 행태를 극력 피하고자 한다. 왜? 극단주의적 대치는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망치는 길이며, 이것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낳는 야만상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의미의 보수주의, 즉 온정적 보수주의는 이 같은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피하면서 사회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유럽의 역사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이다.

그러나 유럽식 보수주의는 미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대신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냉전 반공주의 등이 성장하면서 이들은 결국 극단적인 형태의 신자유주의로, 네오콘-신보수주의-신패권주의로 흡수된다. 오늘날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 쓰나미, 지구 곳곳을 괴롭히는 전쟁 쓰나미는 이들 꼴통들, 즉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권세와 부를 장악한 강자들의 광기어린 탐욕이 불러일으키는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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