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가 종래에는 세계의 금융위기를 넘어 세계 경제 전체를 공황에 가까운 난리로 밀어 넣고 있다. 그리고 그 끝은 상당히 긴 미래에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한편 전쟁과 평화, 테러의 문제 역시 꼬일대로 꼬여 있다. 한반도부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간까지 세계는 늘 위태로운 지경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가 공황에 가까운 난리를 겪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는 다층적이지만,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 특히 미국의 보수주의 정권과 그 주변의 집단들-기업, 싱크탱크, 교회, 언론 등-에 큰 책임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를 맹신하면서 경제질서를 풀어헤쳐 놓았다. 자본의 광란을 선도한 것이다. 이들은 또 네오콘-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펼치면서 세계를 일방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패권적 질서가 가져오는 분열과 갈등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는 맹목적 믿음에 빠진 것이다. 한편 오바마 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의 극우/보수주의 정치는 일단 물러난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부시-체니 같은 보수반동의 과잉에 대한 일회적인 제어인지 아니면 보다 강한 견제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한다.

지금 분명한 것은 극우/보수주의의 폐해가 개별국가를 넘어 전 세계에서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무엇이 미국의 보수주의, 보수주의자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이것이 보수 본래의 모습일까? 지금 한국사회가 겪는 극심한 고통 역시 극우/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초래되는 바 크다. 이 글은 총 6차례에 걸쳐 오늘날 전 세계의 위기를 초래한 보수주의의 문제점을 신자유주의, 네오콘, 우익 기독교 등에 초점을 두고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버클리 이야기

크리스 버클리라는 미국사람이 있다. 2008년 2월 83세를 일기로 사망한 윌리엄 버클리의 아들이다. 그러면 윌리엄 버클리는 누구인가. 석유재벌 집안에 예일대학 출신의 똑똑한 인물. 불과 30세인 1955년에 시사잡지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를 창간, 이를 통해 미국 보수주의 이념을 설파해온 대표적인 이데올로그. 50년대부터 시작, 지금까지 보수주의를 미국의 가장 강력한 정치·사회적 흐름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제1세대 인물.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논객으로 활약하는 G. 윌은-뉴스위크/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버클리가 직접 키운 인물이고, 그런 버클리를 윌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교황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도 내셔널 리뷰는 미국 보수주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가장 유력한 잡지 중 하나이다.

그의 말 중 기록에 남는 것 한 가지. “지금까지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온 일은 진정한 보수와 ‘꼴통’(kooks)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꼴통은 누구일까? 존 버치 소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 같은 극단적 반공주의자들, 극우 단체들, 반유태주의자들이 버클리가 지적한 대표적 사이비들이었다. 학자부터 작가, 방송인까지 다양하기 짝이 없는 그의 경력만큼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을 달린다. 사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마리화나를 즐기기도 하고, ‘돈벌이야말로 예술의 적’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하는 박식한 인문학자로, 우익의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카시를 찬양하는가 하면 인종차별 제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크루그만은 그를 인종차별주의자일 뿐 아니라, 스페인의 프랑코를 열렬히 찬양한 파시스트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한편 N. 촘스키는 그를 적어도 네오콘과 같은 작금의 극우 미국패권주의자들에 비하면 그나마 온건한 축에 속하는 보수주의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서 윌리엄 버클리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창간한 잡지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아들 크리스 버클리가 작년 미국의 대선에서 오바마 지지를 선언한, 작다면 작은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사건은 작은 것이 아니라 2008년의 대선에서 보수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는 시대적 변화의 징표였던 셈이다.

보수주의자들의 분열

버클리의 반란을 포함해 적지 않은 수의 보수주의 칼럼니스트들이나 저명인사들이 2008년의 대선에서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거나 또는 명료하게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공화당의 매케인/페일린에 보낸 비판은 이번에 나타난 보수주의 세력의 분열과 변화를 상징한다.

그럼 원조 보수주의 이데올로그의 아들이 오바마를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 보수주의자들이 물어야 할 것은 미국 보수주의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난 8년 동안 소위 보수정권이 미국사회에 가져온 것은 두 배로 늘어난 천문학적인 국가채무, 무분별한 사회비용의 지출, 예산 낭비, 불법 로비, 무지한 정치인들의 잘못된 전략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이라크·아프간 전쟁, 사생활의 영역을 좌우하려는 엽기적인(obscene) 정부의 행태 등등이다. 결국 내가 공화당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이 나를 떠난 것이다.”

한편 1기 부시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도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기독교도인 오바마를 무슬림교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거짓말도 문제지만 우리가 정작 물어야 할 것은 ‘그래 그 사람이 무슬림이면 어떤가’이다. 지금 무슬림교도인 미국의 어린이가 커서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미국은 다양함 속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나라이다. 지금의 공화당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공화당의 꼴통화

작은 정부, 세금 감면, 균형예산, 도덕적 사회, 전통의 회복, 기독교 윤리 등등을 강력하게 주창해온 레이건과 부시로 대변되는 공화당과 공화당을 압도적으로 지원한 보수주의 집단이 어쩌다가 이렇게 지리멸렬한 지경이 되었을까? 공화당은 도대체 어떤 정당으로 변한 것인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공화당의 문제를 종합해보자. 사상적 고갈에 허덕이고 이념적 혼돈상태에 빠진 정당. 부시 시대에는 칼 로브 같은 선거꾼이 좌우하더니 이제는 극우 선동 방송인인 R. 림보가 당의 지도자처럼 보이는, 그래서 원칙을 가진, 일관성 있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 정당이 아니라 정파적 계산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정당.

닉슨 시대로부터 따지면 30년이 넘도록 사회적 계급, 계층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정치와 선거의 기반을 다지는 전략을 추구해온 정당. 역사에 대한 사유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즉흥적인 결정을 과단성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라고 착각하는 정당. 학습을 통해 내공을 다지고 그에 기초한 논의와 판단을 통해 정책을 펼쳐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엘리트주의적이라며 경시하거나 심지어는 야유하는 반지성적 전통을 키워온 정당.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수준의 사고에 머무르면서 그것이 보통사람들을 대변하는 정치라고 주장하는 빈곤한 철학의 정당. 그래서 정치철학적으로는 군소정당 수준에 머무르는 공화당.

사이비들의 야만과 무지

“페일린은 공화당에 암적인 존재이다.” 버클리가 키운 또 다른 보수 칼럼니스트인 <뉴욕타임스>의 D. 브룩스가 지난 대선을 앞두고 한 말이다. 무슨 뜻일까? 이것은 페일린 개인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페일린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야만과 무지가 오늘날 미국의 공화당뿐 아니라 보수주의 집단을 뒤덮고 있다는 지적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런 페일린을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집단이 하버드 같은 명문대 출신의 네오콘 지식인들이라는 점이다. 배울 만큼 배운 이들이 지난 대선에서 한 일이라고는 페일린과 함께 노벨상을 받은 학자의 충고를 야유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관공이나 목수 같은 일반인들의 경제지식을 더 높이 칭찬하는 데 열을 올렸다. 또 경험 많은 외교관들이나 전문가들을 조롱하면서 외국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국수주의적 언론인이나 방송인들의 발언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화당이 가장 밑바닥에 이르렀다는 것, 공화당의 시대가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 카운터펀치 웹사이트 캡처

“대규모 예산적자, 무분별한 정부지출과 해외분쟁 개입, 연고주의, 사기, 부패, 로비대가 챙기기, 인기영합주의, 권력 위세 부리기.” 이 말은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 의회에 대해 한 보수주의자가 날리는 비판의 핵심이다. 그 보수주의자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뉴라이트 운동에 적극 참여, 공화당 장기집권의 토대를 쌓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 중 하나로 인정받는 R. 비구에리이다. 그의 책 제목은 <배신당한 보수주의-부시와 공화당은 어떻게 보수주의를 배반했는가>이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주의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의 도그마로 가득 찬 사이비이다.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다면서도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명령체제를 지지하며, 자유시장을 주창하면서도 친기업-금권주의 체제와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종교적 열정은 군사적 망상과, 가족의 가치는 물신주의와, 개인주의는 충성심과, 미국중시 정책은 범지구적 패권주의와 등치된다.”-2004년 4월 9, 10일자 <카운터펀치>(카운터펀치는(www.counterpunch.org) 미국의 대표적 진보매체 중 하나임).

레이건은 지난 1985년 재선에 성공한 이후 민주당과 개혁/진보주의자들을 향해 ‘사상적으로 고갈된 집단, 지적 자산을 탕진한 집단’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는 지극히 이중적인, 모순의 정치인이지만 그의 지적은 타당한 바가 적지 않다. 비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반성하지 않을 때,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 때, 권세와 돈을 즐기려 할 때, 힘으로 밀어붙일 때, 이데올로기는 사이비로 전락하게 되고, 그들은 무지한 자들, 야만적인 자들이 되면서 끝내는 꼴통으로 타락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이비들이 자신들뿐 아니라 사회와 나라까지 파탄의 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시-체니의 8년은 나라와 당은 물론 세계를 어지럽게 망친 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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