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은 모든 것을 통제하지만 어떤 사용자 책임도 지지 않는다. 법을 다루는 학문은 원청을 ‘공동사용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실제 법에서 원청의 사용자 책임은 없다. 용역‧파견‧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수준은 원청이 결정하지만 교섭 자리에는 ‘바지사장’이 나온다. ‘진짜사장’ 원청은 공식적으로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자신을 “협력업체 노사문제를 해결해 고객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선의의 중재자”로만 노출하려 한다.

귀뚜라미보일러를 고치는 수리기사,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일하는 애니콜 기사(지금은 ‘갤럭시’ 기사), 유료방송과 초고속인터넷을 설치‧수리하는 기사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모두 원청인 재벌 대기업의 기업 이미지가 그려진 조끼를 입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은 모두 원청이 고용한 직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삼성, 티브로드, 씨앤앰, SK, LG 같은 재벌 대기업은 자신의 상시필수업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서비스’ 부문을 다단계 하도급을 활용해 외주화하면서 노동몫으로 지출하는 고정비를 절감하고 사용자 책임을 회피해 왔다.

▲토론회 모습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술서비스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 진짜사장 재벌의 실체와 사회적 해결방안> 토론회에서 “한국의 서비스산업은 1990년대부터 전략적으로 외주화, 실질적 지배종속의 원‧하청 관계를 선택했고 다른 산업에서도 이를 모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민규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전략사업실장은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삼성전자서비스의 원‧하청 업무흐름도를 분석했는데,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원청이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비밀은 자신들이 해야 할 영업부문의 대부분을 도급 형식으로 외주화한 데에 있다”고 지적했다.

기술서비스 산업 원청의 외주화 전략 궤적인 매우 유사하다. 삼성전자서비스를 보자. 이유미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분석했다. “외환위기 직후 삼성전자서비스는 분사하여 삼성전자로부터 위탁받은 수리서비스를 하청업체에 재위탁하는 관계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센터를 통합, 대형화하면서 조직구조를 하청계열화했으며 노동과정 및 결과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하청업체 사장은 원청 퇴직자의 퇴직관리 전략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2년 이후 원청의 하청 관리 전략은 위장도급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유미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사진=미디어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 (사진=미디어스)

필수상시업무를 외주화한 경영전략은 실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이동통신시장의 가입자당 매출(ARPU)과 영업이익률 추이, 경영전략을 분석했는데 “사업자들이 가입자수를 늘리기 위해 경쟁하면서 ARPU와 영업이익률은 오히려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원청은 경영전략의 실패를 협력업체로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김동원 국장은 “가입자 영업, 설치/AS/철거 등 고정형 방송통신 서비스에 종사해 온 노동자들은 더욱 불안정한 고용/노동 조건으로 몰아넣고, 사업자가 집중하는 방송통신결합상품 또한 또 다른 불안정 노동이 동원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3년을 전후로 기술서비스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원청인 재벌 대기업을 상대로 한 싸움에 나선 것과 맞물린다. 자본의 외주화 전략이 노동의 위기를 임계점까지 끌어올렸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원청은 오히려 외주화를 늘리는 방향이다. 김종진 연구위원은 “문제는 실제로 국내 통신 및 케이블 방송 내 직접고용 비정규직뿐 아니라, 개통‧AS‧멀티기사의 절반 정도가 현재 협력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이며, 문제는 2015년 노사간 임금 및 단체협약 체결 이후 오히려 도급인력 기사가 23% 더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간접고용의 경우, 하도급업체 정규직도 다수 있지만 사실상 파리목숨이다. 원청이 노조 결성과 저성과를 이유로 계약을 해지해버리면 하도급업체는 ‘폐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단계하도급 문제의 뿌리는 원청의 외주화 정책에 있다. 원청 입장에서 보면 사용자 책임을 덜고 비용을 절감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일 수 있다. 방송통신업계에 다단계하도급이 만연한 이유는 이 같은 방식으로 얻어내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1차 하도급업체는 재하도급을 주고, 노동자들은 ‘수수료’를 잃지 않기 위해 개인사업자로 변한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한국의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는 지금 비켜설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고 말했다.

현실에서 노동자가 기댈 제도적 장치는 사법부다. 그러나 여의치 않다. 원청에 의한 부당노동행위에 제동을 걸거나, 원청의 사용자성을 일부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간혹 나오지만 다단계하도급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판결은 아직까지 없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류하경 변호사는 “간접고용과 다단계하도급은 거대기업과 방송통신 기술서비스 산업에서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다. 법원이 산업 구조 전체를 뒤흔들 용기를 낼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

▲류하경 변호사 (사진=미디어스)

여소야대 국면을 활용한 제도 개선 요구와 현장-지역-노조를 묶어 ‘반재벌 투쟁’을 병행하는 투 트랙(two track) 전략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제안이다. 오민규 실장은 “원청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이 서비스와 관련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서도, 비정규직의 등골을 뽑아 이윤만 챙겨가는 재벌 대기업들이 책임지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남신 소장은 “현장에서 제기된 핵심 입법 정책 과제를 20대 여소야대 국회에 제출하고, 동시다발로 격화되고 있는 비정규직 현장투쟁을 공동으로 전략으로 엮을 때만이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원청의 직접교섭 책임, 원청에 의한 대체인력 투입 금지, 하청업체 교체시 고용‧근속‧단협 승계와 같은 제도 개선 요구를 하면서, 여러 노조가 함께 재벌 대기업에 ‘좋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싸움을 벌여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사진=미디어스)
▲오민규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전략사업실장 (사진=미디어스)

류하경 변호사는 “간접고용 사업장에서 원청이 근로조건 결정의 실질적 통제자라고 인정되면 원청에게 노조법상 교섭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진 연구위원은 ‘간접고용세금’ 같은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고 나쁜 일자리를 만든 기업에 세금을 매기자”는 이야기다. 이유미 연구원은 “기술서비스 노동자들이 공동투쟁을 벌이는 데에 사회적 여론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며 “대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여진의 경영실패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 만큼 원청 대기업에 ‘사용자 책임’을 묻는 캠페인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에 요구할 것도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장관 최양희)는 이번에 SK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을 심사하면서 심사주안점안에 △원‧하청 고용안정 방안 △노무관리 정책 △기업의 사회적 신용 등을 포함했다. 언론운동단체와 노동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국장은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선례로 유료방송사업자들의 재허가 심사에도 동일한 항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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