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 티에리는 절박하다. 고용센터에서 15주나 되는 직업교육을 들었지만 결국 취직에 실패했다. 상담사는 다른 교육을 들어보라고 추천하지만 그에게는 여유가 없다. 실업급여는 곧 끊길 예정이고,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장애인인 그의 아들은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고, 당장 내야 할 기숙사비와 학비도 만만치 않다.

얼마 전 그는 동료 수백 명과 함께 대량해고를 당했다. 파업도 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옛 동료들은 해고 무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동료들은 티에리에게도 소송을 함께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동료들은 납득하기 힘들다. 이길 가능성도 있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소송 준비도 할 수 있는데 왜 같이 하지 않냐는 것이다.

그가 동료들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이렇다. 그는 지쳤다. 공장 이름 자체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충분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소송을 통해 또 다시 그 고통을 되새기기 싫은 것이다.

영화 <아버지의 초상>은 초반부의 몇몇 대화 장면─고용센터에서의 상담, 가족의 저녁식사, 옛 동료들과의 대화─을 통해 중년의 실직 노동자 티에리가 처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티에리가 구직을 하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그가 취직한 후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여기서 감독 스테판 브리제는 특정 상황에 처한 인물의 표정을 밀착해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구직과정에서 티에리는 온라인으로 취업 면접을 보거나, 대출 상담을 받는다. 하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진다. 대출 상담사는 겨우 빚을 다 갚아가던 아파트를 팔라거나, 가족들을 위해서 사망보험이라도 들어놓으라는 어처구니없는 권유를 한다. 급한 대로 티에리는 교외에 있는 전원주택이라도 팔아보려 내놓는다. 하지만 집을 보러 온 사람은 이것저것 트집 잡아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해 실랑이가 벌어진다.

그런 위기와 공격의 순간마다 카메라는 티에리의 표정을 담는다. 사실 그의 표정에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담담한 것 같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티에리는 그 모멸감을 견디려고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취직만 된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질 거라는 듯이.

불안한 기운

다행히도 취직에 성공한 티에리. 영화의 후반부는 그가 취직한 직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티에리는 이제 한 대형마트의 보안직원이다.

첫 출근 날의 풍경은 예상 밖이다. 전 직원이 모여 30년 넘게 근무한 직원의 퇴직을 축하하는 감사 이벤트가 열린다. 티에리는 이 감동적인 광경을 보며, 드디어 구질구질한 시간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꿈꾼다. 어쩌면 그도 오늘 퇴직하는 동료처럼 마트에서 오랜 시간 일한 뒤 동료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멋지게 퇴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내내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불안한 기운이 엄습한다. 그의 업무는 마트 내 보안 카메라로 손님을 감시하는 일이다. 영화는 꽤 오랜 시간 마트 안을 CCTV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CCTV 특유의 거친 입자를 살리고, 공간 전체를 내려다보는 각도다. 이 장면은 영화 내에서 매우 이질적이다. 영화가 시종일관 견지했던 인물들을 밀착해서 보는 관점과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선이 주인공의 표정의 작은 변화도 감지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반면에, 보안 카메라를 통해서는 마트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보인다. 꼼꼼하게 스타킹을 고르는 할머니도, 장난치며 와인을 사는 흑인 연인도, 음반을 들고 있는 아저씨도, 친절한 캐셔 직원도 CCTV 화면 안에서는 모두 예비 범죄자다.

노동자의 딜레마

그러던 중 마트 점장이 티에리에게 특별한 미션을 떠맡긴다. 직원을 줄이려고 하는데 해고할 명분이 없으니 동료들을 특히 더 감시하라는 것이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그의 일이므로 어쩔 수 없다. 결국 한 캐셔 직원이 걸렸다. 손님의 할인쿠폰을 빼돌리다가 발각된 것이다. 그것도 동료의 퇴직을 앞장서서 축하해주던 정이 많아보이는 여직원이다. 그녀는 그깟 일로 해고냐며 억울해하지만 누구든 해고시켜야 하는 회사는 개의치 않는다.

결국 그녀는 해고된다. 그런데 얼마 뒤 점장이 전 직원을 불러 모은다. 해고된 여직원이 직장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초상>은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만연해진 오늘날 유럽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작년 초 개봉했던 <내일을 위한 시간>과 비교된다.(<오늘보다> 2015년 1월호 참고)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직장에서 부당한 상황을 마주한 주인공의 딜레마를 드러내고 있다. 인물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카메라 기법도 비슷하게 쓰였다. 차이가 있다면 앞선 리뷰가 말하듯 <내일을 위한 시간>이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분열과 갈등, 그 감정의 면면”을 잘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의 초상>은 딜레마적 상황을 마주한 티에리의 감정과 자기 번민을 깊숙이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잔혹한 ‘시장의 법칙’

사실 <아버지의 초상>의 원제는 ‘시장의 법칙(La loi du marche)’이다. ‘시장’의 매정한 법칙이 그러하듯 해고된 직원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큰 변화가 없다. 점장은 또 다시 다른 직원의 작은 실수를 잡아내 해고하려 한다.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티에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공간에서 잠시 고뇌하더니, 곧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걸어나간다. 시종일관 티에리를 바로 곁에서 잡아오던 카메라는 처음으로 그와 거리를 둔다. 차를 타고 떠나는 티에리를 쫓아가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볼 뿐이다.

티에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옛 동료들을 다시 찾아가서 해고 무효 투쟁을 하게 될까? 우리는 거기까지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위안을 찾지 않았으며, 이전의 삶의 태도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실업자이든 직장인이든 이 사회는 개인에게 끊임없는 모멸감을 준다는 것을 그는 알아버렸다. 더 이상 회피할 수도 그저 견딜 수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티에리의 뒷모습은 우리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딜레마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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