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이라 칭하는 OJ심슨 사건. 94년 흑인 미식축구 영웅인 심슨의 전처 니콜과 전처의 남자친구였던 로널드 골드만이 니콜의 집에서 살해당했고, 현장에서 3km 떨어진 심슨의 집에서 피 묻은 장갑이 발견되면서 심슨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재판 초기 심슨이 범인이 아니라고 믿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OJ 심슨, 그가 아내를 죽였을까 죽이지 않았을까? 이 물음이 조선일보 VS 김종배·김주언 의 최근 대법원 판결을 읽어내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일보 VS 김종배·김주언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지난 12일 대법원은 조선일보가 ‘이승복 기사 오보 전시회’를 개최한 김주언 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5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 원심을 확정했다.

▲ 2월 13일자 조선일보 8면 기사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8년 12월 조선일보가 ‘공비, 일가 4명을 참살’이란 기사에서 고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무참히 죽어간 사건을 특종으로 실었다. 그리고 고 이승복 어린이는 각 초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연스레 반공이데올로기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나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당시 이 조선일보 기사를 작성한 강인원 전 조선일보 기자와 노형옥 전 사진기자가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말들이 팽배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1992년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은 <저널리즘> 가을호에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조작됐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또한 이를 토대로 1998년 김주언 전 사무총장이 서울과 부산에서 ‘이승복 기사 오보 전시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일보는 김종배 전 편집국장과 김주언 전 사무총장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지난 2007년 9월 서울고법은 “조선일보 기자가 이승복 사건의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보도했던 김종배 편집국장에 대해 위법성 조각사유가 인정된다고 판결한 반면 ‘오보 전시회’를 개최한 김주언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5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었다. 이것이 지난 12일에 확정된 판결 결과이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승리감에 도취한 상황이다. 판결이 난 다음 날 바로 1면에는 “‘조선일보의 이승복 보도는 진실’, 대법 ‘오보 전시회측, 손해배상해야’” 제목의 기사를 배치하고, 8면에는 “이승복 동상 철거하고, 교과서에서 빼고…17년간 활개친 광기들”이란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또한 “이젠 이승복군에 대한 사회적 복권 이뤄져야”란 사설을 통해 “역사적 복권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이번 판결은 고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나’, ‘안했나’가 아니다. 판결의 핵심은 취재 현장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있다.

법리적 해석으로 조선일보의 ‘공산당이 싫어요’는 사실

여기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있다. 확연하게 배치하는 경우 재판부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이 타당한지를 판단하게 된다. 이번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조선일보 기자가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사회적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던 김종배 전 편집국장과 김주언 전 사무총장의 주장이 타당한지가 판결의 기준이 된 것이다.

김종배 전 편집국장의 위법성 조각사유로 인정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나하면 ‘위법성 조각사유 인정’이라고 판단한 것은 김종배 전 편집국장이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사유를 법원이 인정한다는 점이며, 이로부터 재판이 출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이 부분이 명확하게 가려질 수 없다면 이 사건은 법리적으로 종결된다고 하더라도 논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재판부가 김종배 전 편집장의 위법성 조각사유를 인정한 부분은 아래와 같다.

△68년 당시 기사를 썼던 강인원 노형옥 기자가 김 전 국장의 취재를 회피했다는 점
△이승복 기사가 언론계에서 작문 기사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
△당시 현장에 갔었던 강한필 전 경향신문 기자도 이승복군의 말이나 조선일보 기자를 현장에서 접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모씨도 조선일보 기사가 사실인지 조작인지 반반으로 본다고 진술한 점
△한국일보 강릉주재기자였던 박주환씨가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가 사건 현장이 아닌 조선일보 강릉지사에서 전화로 기사를 송고한 것을 봤다”며 “조선일보 강릉주재기자였던 송모씨한테서 ‘공비가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다고 해서 입을 찢었겠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진술했다는 점
△이승복 사건의 목격자이자 형인 이학관씨도 사건 직후 병원으로 후송되느라 기자 뿐 아니라 마을주민들에게도 상황을 제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는 점
△이학관씨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었다는 최순옥씨도 이씨가 부상을 당한 직후 자신의 집으로 와 공비에게 참살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신 외엔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없었고, 이 말을 다른 사람이나 기자에게 전한 바도 없다고 진술한 점
△조선일보가 피고들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취재 때는 전혀 언급이 없다가 형사소송을 진행하면서야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는 필름을 증거로 제출한 점

대법원은 2006년 김종배 전 편집국장과 김주언 전 사무총장의 유죄가 확정된 형사재판 결과를 근거로 원심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유죄 확정의 근거가 된 것은 조선일보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당시 촬영된 필름 원본이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피고 변론을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원본 필름 자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의혹은 △당시 기사를 썼던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점 △강 기자가 사진 속 인물을 자신이라고 지목했다가 번복하는 등 진술이 오락가락한 점 △시신의 위치에 대한 진술이 사실과 다른 점 등을 들었지만 이러한 피고의 문제제기를 재판부에서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채로 이 사건은 법적으로 종결됐다. 결국 사회적 사실에 대해서 그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던 김종배 전 편집국장이 그렇게 생각할 근거로는 충분하지만 법적 다툼에서 증거로써 인정받기에는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조선일보 기자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를 댈 필요가 없다. 물론 진술이 바뀐 것은 ‘오래 전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정받았다.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와 경향신문 강한필·이봉섭 기자가 서로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나 조선일보 노형옥 사진기자가 경향신문 이봉섭 기자를 봤다”는 진술만으로 조선일보 기자들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선일보 기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역시 조선일보 기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묻는다. 조선일보 기자는 현장에 있었을까?

다시 OJ 심슨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OJ 심슨, 그가 아내를 죽였을까 죽이지 않았을까? 사건 발생 이후 심슨은 일당 1만5천달러(1200만원)를 들여 ‘꿈의 변호인단’을 구성했고 이러한 변호인단의 활약으로 심슨은 무죄로 풀려났다. 변호인단은 검찰 측이 심슨이 범인이라고 단정했던 증거물인 ‘심슨이 범행 당시 끼었던 장갑’에 대한 증거부터 무효화시켰다. 심슨은 법정에서 직접 끼어 보이면서 장갑이 손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자 ‘그래도 이게 내 장갑이냐’며 따져 물었다.

또한 심슨 사건의 초동수사에 참여했던 백인 경관 마크 퍼먼이 한 시나리오 작가와 나누었던 녹음테이프를 공개했다. 그 테이프에는 ‘냄새나는 검둥이들’, ‘검둥이 수놈’, ‘멍청이 검둥이들’ 등 마크 퍼먼의 인종비하 단어가 41차례나 녹음돼 있었고 “범인을 감옥에 처넣기 위해 증거에 손을 대야 할 때가 있어”라는 말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마크 퍼먼은 심슨의 집에서 범행에 사용됐던 피묻은 장갑을 발견하는 등 결정적인 증인이기도 했으나 이로써 증거의 신빙성을 잃어버림은 물론 사건 자체를 ‘인종차별’로 변질시켰다.

그렇게 심슨은 법적으로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심슨의 친구 마이크 길버트는 <나는 어떻게 OJ가 살인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나>라는 자서전에서 “심슨이 아내를 살해했다고 고백했다”고 밝혔다. 물론 심슨 측 변호인은 마이크 길버트를 약물중독자의 말이라며 반박했지만.

또 다른 사건을 들어보자. 97년 한국인 대학생이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에서 살해됐다. 용의자로는 ‘에드워드 리’와 ‘아더 패터슨’이 검거했다. 이 둘은 “둘 중 한 사람이 죽인 것이 분명하다”면서도 “서로 범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여러 정황상 흉기는 패터슨의 소유였지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에드워드 리로 지목됐다. 그러나 98년 10월 대법원은 에드워드 리에 대해 최종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이었다. 결국 둘 중 한 명이 확실히 살인자였지만 둘 다 “죄 없음”으로 풀려난 것이다. 이것이 법적 해석이다.

대법원은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줬다. 그럼에도 조선일보 기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이번 사건을 통해 절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사회적 사실’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이다. (물론 이 역시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그랬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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