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행정관이 경찰청 홍보관에게 ‘용산 참사를 군포 연쇄살인 사건으로 잠재우라’는 의견(?)이 담긴 이메일을 보낸 것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놀라운 ‘청와대 이메일 사건’은 참여정부 정권 말기인 2007년에도 있었으니, 이름하여 온 나라를 뒤흔든 ‘변양균 이메일’이다. 변양균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학력위조 논란을 일으킨 신정아 당시 동국대 교수 사이에 오갔다는 ‘이메일’이 검찰에 의해 공개되면서, 두 사람의 ‘연인 관계’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최초 학력위조 의혹으로 시작된 수사는, 2007년 9월 서울 서부지검이 압수한 신씨 컴퓨터의 이메일을 복구해 신씨와 변씨의 모종의 관계를 밝히면서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금세 확대됐다. 변 실장은 그간 의혹을 부인하다가 이메일 내용이 알려지자 바로 사직했고,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 동아일보 2007년 9월11일자 3면 기사

그러자 조선일보 등 다수 언론들은 연애전문지(?)로 돌변해 “변 전 실장이 신씨와 거의 노골적이라고 판단될 정도의 내용도 포함된 연애편지 수준의 이메일 100여통을 주고 받았다”며 ‘오빠가’로 시작하는 이메일들과 변씨가 준 선물 등 ‘두 사람의 연애 관계’와 관련한 노골적인 기사들을 대거 쏟아냈다. 열띤 경쟁심리 탓인지 문화일보는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우며 신씨의 누드사진을 전격 공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 변양균 이메일’로 인해 증폭된 ‘신정아-변양균 사태’는, 그 시기 또 다른 핫이슈인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자와 BBK사건’을 ‘찻잔속의 태풍’ 정도로 덮을 만큼 초강력 뉴스로 언론에서 다뤄졌다.

이후 검찰은 ‘변씨가 지위를 이용해 신씨의 교수 임용을 도왔다’며 권력남용 및 뇌물수수 의혹 등 여러 혐의들을 제기했고, 재판이 진행중이다. 지난해 법원은 ‘변씨는 신씨의 교수 임용을 도운 혐의가 없다’는 판결과 함께, 변씨가 청와대 정책실장 재직 시절 모 사찰에 특별교부금 10억원 지원 압력을 행사한 혐의(직권남용)에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변씨의 연애에 난리치던 언론은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변씨 관련 판결을 짤막하게만 처리했다.

언론은 2009년 또다시 ‘청와대 이메일’과 맞닥뜨렸다. 이번 ‘청와대 이메일’에는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주기 바란다’는, 언론에 굴욕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성호 행정관이 거론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등의 내용은 일부 언론에서 그대로 보도되기도 했다.

BBK 사건을 무사히 견뎌내고 탄생한 이명박 정부는 고질적인 ‘나 몰라라’ 화법으로 뭉개고 있는 중이다. 청와대와 경찰청은 부인하다가 하루 만에 말을 바꾸어 ‘개인적 행동이었다’며 구체적인 진상을 밝히지 않은 채 ‘구두 경고’로 어물쩍 넘어갔고, 이 행정관은 이틀 뒤 자진 사직했다.

▲ 한겨레 2009년 2월 18일치 6면 기사

그런데도 일부 언론들은 청와대와 경찰청의 ‘언론 휘두르기’ 이메일에 대해 잠잠하다.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여기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일부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는 와중에도 사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청와대 이메일’ 발송 시점을 놓고 또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청와대의 ‘지난 3일에 개인적으로 보냈다는 주장’과 ‘3일 이전에 경찰청 홍보관보다 서울경찰청 인사청문팀에 먼저 보냈다’는 야당의 반박이 맞서고 있다. 민주당 김유정 의원은 지난 17일 청와대의 ‘여론 조작을 위한 조직적 배포 가능성’을 제기했고, 오마이뉴스는 같은 날 “설 연휴 직후에 보냈다”는 제보자의 주장을 보도했다.

청와대의 주장대로라면 이 행정관이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낸 시점은 이미 강모씨가 검찰에 송치된 날로, 연쇄살인사건 공개(1월 30일)와 조선·중앙의 혐의자 얼굴공개(1월 31일) 등으로 언론보도가 한껏 쏟아진 이후라 ‘뒷북 메일’인 셈이다. 청와대의 주장이 맞다면 이메일의 파괴력은 적지만 이 행정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행동을 한, 짤려도 할 말 없는 무능한 공직자 꼴이 된다. 반대로 이메일을 보낸 시점이 사건 공개 시점에 근접했었다면 이메일의 파괴력은 놀랄 만한 것이었고, 이 행정관은 단지 운이 나빴을 뿐 걸출한 공직자였다.

▲ 중앙일보 2009년 1월 28일치 12면 기사
이처럼 태풍의 눈이 될 수도 있는 쟁점을 놓고, 조중동은 오늘(18일)치 지면에서 단 한 줄의 기사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청와대 공직자 변양균씨가 연인에게 ‘치킨 시켜먹을까’라며 보낸 ‘사적인 이메일’도 대형 비리사건의 단초가 된다며 조중동 등 다수 언론이 들고 나섰는데, 또다른 청와대 행정관이 경찰청 홍보관에게 보낸 ‘타부처와 공조해서 언론 플레이 하라’는 ‘공적인 이메일’에 대해서 조중동은 어째서 입을 닫고 있을까.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18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국 성인남여 1천명의 57.2%는 청와대의 ‘이메일 홍보지침’ 논란과 관련, ‘사실상 여론조작 시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청와대의 ‘청와대 행정관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에는 27.3%가 동의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조중동이 앞장서 연쇄살인범 얼굴 공개를 감행하며 그 근거로 내세웠던 ‘국민의 알권리’에 부합할 만큼의 여론이 아닐런지. 조중동이 계속 ‘알권리’를 외면한 채로 청와대의 홍보지침 논란에 잠잠한다면, 스스로 ‘경찰의 입만 바라보는 언론’임을 자임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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