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가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비밀 편지를 모은 어찰첩을 공개했다. ‘학자군주’로 알려졌던 정조의 새로운 모습들이 담겨있는 이 편지에 대해 각종 언론들은 ‘200년 만에 열린 블랙박스’ ‘최초 공개’ 등 화려한 수사문구를 붙이며 주요하게 보도했다.

그런데, 정조의 비밀 편지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최초가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는 이번주 발행된 한국방송대학보에서 발굴한 내용이다.

<‘두 얼굴의 正祖’ 새로운 사실 아니다> 기사에 따르면,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던 고 최영희 교수는 지난 2000년 열린 학술발표회장에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언급했다.

▲ 한국방송대학보의 정조 관련 기사(http://news.knou.ac.kr/)
<한국사학사학보4>(2001년 9월)에는 “기회가 있어 정조의 어필 간찰을 볼 수 있었는데, 서른 몇 장이었습니다. 심환지에게 보낸 것인데 그는 정조대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습니다. 이 분이 가회동에서 살다가 노량진에서 살았는데 정조는 밤중에도 심환지에게 간찰을 보냈습니다. 내용에 몇 시라는 것이 나와서 알 수 있습니다”라는 고 최 교수의 발언이 기록돼있다.

한국방송대학보 “9년전 고 최영희 교수가 학술발표회서 이미 언급”

당시 최 교수는 “심환지가 노량진에 살 때였는데, 급한 것도 아닌데 정조는 간찰을 보냈습니다. 충청도 촌사람들이 몇 번씩 소를 올리냐고 적혀 있습니다” “이 간찰에는 은어도 나와요. 전라도의 누구에게 벼슬하라고 했는데 안올라오니까 ‘저 놈이, 조상 대대로 국록을 받아먹은 놈인데 내 말을 안 듣고 있으니 개새끼냐? 돼지새끼냐?라고요” 등 구체적으로 편지 내용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방송대학보는 해당 기사에서 이같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 ‘최초 공개다’ ‘역사를 다시 쓰자’는 식으로 자극적인 보도를 하고 있는 언론보도를 꼬집기도 했다.

한국방송대학보는 “학자들은 이번 공개를 보도한 기자들이 이런 전후 사실을 잘 모른 채 지나치게 ‘최초 공개’ ‘역사를 다시 써야’ ‘통설 뒤집는 발견’ ‘학계흥분’ 등의 자극적인 표현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며 언론들이 전문가를 앞세워 정조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학계는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에 우려를 나타냈다. 송찬섭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정조를 평가하는 데는 긍정적·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다뤄져야 한다. 기존에 존재하는 자료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정조를 비판할 수 있는 만큼 새로운 자료가 공개됐다고 거기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방송대학보는 언론들이 정조의 독살설이 더욱 확증됐다는 식의 보도를 하는 것에 대해 “독살설은 학계의 연구보다는 이인화씨의 소설 <영원한 제국>이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일반인에게 하나의 사실처럼 각인됐다”(송찬섭 교수) “독살설과 같이 제대로 된 학문적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소수 주장을 강조하는 것은 비밀편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태도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비전문가에 의해 재단되는 평가에 휘둘려야 할 필요는 없다”(유봉학 한신대 교수) 등 학계의 평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 중앙일보 2월 10일자 23면
언론들이 사실여부 확인 없이 ‘비밀편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자료’라는 동아시아학술원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고 학문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독살설을 부풀리는 사이 한 학보사 기자는 정조의 비밀편지가 언론에서 왜 이렇게 강조되는지 궁금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취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이승한 기자는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정조의 비밀편지가 언론에서 왜 이렇게 강조되는지 궁금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모 교수와의 대화에서 (이번 편지가) 이미 9년 전에도 알려진 내용이란 걸 알게 됐고, 당장 ‘한국사학사학보4’(2001년 9월)를 편집국으로 들고와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고 밝혔다.

이승한 기자 “언론들, 자극적 보도…주도면밀하게 접근해야”

이 기자는 “이미 공개된 내용이었다 해도 이번 공개는 적극적인 번역과 본격적인 연구로서는 사실상 처음이기 때문에 이번 발표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 보지 않는다”며 “내 기사는 이걸 인정하면서도 이미 9년 전에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정조의 비밀편지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해왔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자는 “고 최영희 교수가 탈초가 안된 상태에서 바로 원본을 읽었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 탈초(정자체로 풀어쓰기), 번역, 분석을 거쳐야 내용을 알아볼 수 있다. 누가 했든 탈초는 돼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 기자는 정조 비밀편지 관련 언론보도에 대해 “‘최초’를 강조하며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주도면밀하게 종합적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지적했다. 사실관계에 대해 정확히 따져보지 않고 자극적 보도를 내보내는 직업 기자와 한 학보사 기자의 발군의 노력이 대비됐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