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 <2012>를 보자. 전 세계가 천재지변으로 몸살을 앓는 동안 주인공과 그의 가족은 지진과 해일을 피해 온전히 살아남는다. 규모 9의 지진이 모든 사람을 덮치는 <샌 안드레아스> 경우에도 주인공과 아내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구하는 임무에 성공한다. 그렇다. <2012> 및 <샌 안드레아스>와 같은 재난영화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한국영화와 할리우드 영화는 ‘가족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화 <곡성> 스틸 이미지

가족이 똘똘 뭉치기만 하면 그 어떤 역경이나 고난도 이길 수 있고, 소원했던 가족관계 역시 고난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가족주의의 판타지는 <다이 하드> 시리즈와 같은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족이 단결하고 뭉치기만 한다면 진도 9의 강진이나 그 어떤 천재지변, 혹은 테러범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위협은 그동안 소홀하던 가족관계를 다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기폭제로도 작용하게 만든다는 것이 많은 영화에 나타나는 가족주의의 판타지 아니던가.

영화 <곡성> 스틸 이미지

그런데 <곡성>은 이런 할리우드나 한국영화가 추종하는 가족주의라는 테마를 노골적으로 비웃는 공포영화다. <곡성>의 피해자는 연쇄살인범과 같은 외부인에 의해 희생당한 게 아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에 의해 몰살당하는 존속살해의 행태가 자행되는 걸 영화 안에서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대다수의 한국영화와 할리우드 영화가 추종하는 ‘가족주의의 신화’를 <곡성>이 무참하게 해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인 가족이 가족을 배신하고 존속살해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건 스포일러가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가족이 가족을 살해했다는 게 시퀀스로 드러나니 말이다.

가족이 가족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가족주의의 해체는 <곡성>에서 가장 주요한 코드 가운데 하나인 ‘불신’을 강조한다. 가족이 가족을 살해하는 가족 안의 지옥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불신이 영화에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가족으로부터 목숨을 잃는 것 마냥, <곡성>은 신뢰할 법한 그 누구도 100%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불신지옥의 끝판왕이다. 신뢰할 대상은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이나 기족이 아니라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불신지옥 말이다.

영화 <곡성> 포스터

<곡성>이 미드 <엑스파일>에서 주인공인 멀더가 입에 달고 다니는 명제 ‘아무도 믿지 마라(Trust no one)'을 추종하는 건 <곡성>의 종교관에서도 볼 수 있다. <검은 사제들>에서 귀신들린 딸을 둔 가족들이 믿을 수 있었던 건 가톨릭의 구마의식을 행하는 구마 사제들이었다. 가톨릭이 귀신 들린 딸을 구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곡성>에서는 종교가 악마를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의 부제조차 악마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고 사람인지 악마인지 분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제의 위에 있는 신부는 구원의 손을 내미는 영화 속 캐릭터의 절실한 호소를 외면하지 않던가. 종교조차 개인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 <곡성>의 세계관이다. <곡성>의 그 끔찍한 결말이 함의하고 있는 건 <엑스파일> 속 멀더의 ‘아무도 믿지 마라’는 명제이다. 심지어는 종교나 가족조차도 말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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